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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우 시인 / 바람도서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6.
김은우 시인 / 바람도서관

김은우 시인 / 바람도서관

 

 

수시로 펄럭이는 바람도서관의 낡은

책들은 등뼈가 휘었다

모서리가 닳고 닳아 쉽게 넘겨지지 않는 가장자리엔

폭우 한가운데를 지나 그곳에 당도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매장되어 있다

수많은 낱말들이 햇살에 반짝이는 책들

속눈썹 안쪽에 모든 길의 나침반이 숨겨져 있다.

흔들림이 멈추지 않는 바람도서관 입구엔

푸른 사색 나무들이 즐비하다

허구한 날 바람바라기하는 바람 중독자인

사색나무는 너무 무거운 생각들로 한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든다.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은 잎사귀들을 날려 보내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문장으로 늘 목이 마르다

물속의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바람의 싱싱한

수사가 무료나 권태를 훌훌 떨쳐버리는

마침표가 없는 문장으로 기록된 책들로 가득한

바람도서관 그늘 깊은 눈빛을 늦은 오후가 읽고 간다

 

-시집 <바람도서관>에서

 

 


 

 

김은우 시인 / 타인의 무늬

 

 

무얼 그릴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흰빛을 사랑하지만 온몸에

여러 빛깔의 물감을 덧칠합니다

 

붉고 검은 얼룩덜룩한 무늬들

호피문양이 그려집니다

타인이 되기 위해 나를 지우고

타자가 될 각오를 단단히 합니다

 

울창한 숲에 이르러 몸을 낮추고

엉거주춤 무릎을 구부립니다

온몸에 번지며 덧입혀지는 상처의 빛깔

분노로 가득한 흑갈색 매서운 눈동자

허연 수염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으르렁 포효합니다.

나비가 날아가고 새가 날아가고

후다닥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

일그러진 입을 그리고 마무리합니다

보디페인팅이 사방으로 흘러내립니다

 

 


 

김은우 시인

광주에서 출생. 1999년 《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 『바람도서관』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 『귀는 눈을 감았다』 『만난 적은 없지만 가본 적은 있지요』. 2015년 전남문화예술재단기금 수혜. 2016년에는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2020년에는 전남문화관광재단기금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