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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천 시인 / 나침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6.
김혜천 시인 / 나침판

김혜천 시인 / 나침판

 

 

담쟁이가 벽을 덮을 모략으로

도톰한 잎새를 부풀린다

모호한 경계 틈새로 촉수를 뻗는다

 

기성의 담론과

새 시대 혁신 사이 벌어진 틈새로

불온한 의도가 손을 내민다

 

의도부터가 기망欺罔을 바탕으로 한 초록 나침판

흔들리고 가리고 흔들리고 가리고

 

유사가 판치는 소음의 시대

나침반은 언제나 정북을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의 현기증 사이로 확성기를 켠다

 

전류의 미세한 파장으로

잠시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는 나침판

 

거짓은 또 다른 것짓으로 변이되고

암각을 모사하여 마을의 벽화를 그린다

서로를 겨냥한 책채가 화려하다

 

자서전을 대필하게 할 날이 오기도 전

서로를 줄줄 흘리는 기성과 혁신들

한 봉지에 담겨 온통 물러터진다

 

팩트는 편집 가공되고

균열을 견디지 못한 벽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시산맥』 2020-가을호

 

 


 

 

김혜천 시인 / 묵상을 따라 걷다

 

수도자의 영토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주머니와 두벌의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했다

 

가난하고 앙상한 모습으로

여름내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저 수직으로 벼랑의 세운 성전은 무엇의 상징인가

 

마음 안에 우상을 몰아내기 위하여

경계 밖으로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치열하다

 

돔 한가운데

오클루스로 쏟아지는 빛의 유희와 어둠의 장엄한 심포니

벽은 거친 표정을 바꾸며 숨 쉬고

견고한 바닥은 빛의 산란을 받아낸다

 

공명하는 건 사유뿐

노동의 열매는 영성의 도달하는 것이다, 아니다

도달하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을 때 한계를 뛰어넘는다

 

석관을 밀면 나오는 비밀 통로도 아직은 세속

 

빛의 흔적마저 사라진 어둠의 공간

이름할 수 없는 천 가지 형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침묵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영의 소리

언어는 일체가 사라질 때 보인다

 

침묵 속에서 틈으로 솟구친 말이 시원始原으로 돌아간다

세상을 버리고 자기마저 부인하고 나면

마침내 도달하여 고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계간 『시산맥』 2024년 겨울호 발표

 

 


 

김혜천 시인

서울에서 출생. (본명: 김혜숙). 2015년 월간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을 통해 등단.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 2017년 이어도문학상, 2020년 푸른시학상 수상. 2022년 시산맥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다도(茶道) 강사, 불교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