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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운진 시인 / 아름다운 복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6.
이운진 시인 / 아름다운 복수

이운진 시인 / 아름다운 복수

 

 

신도 자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는 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의 지옥이라는 말,

 

올해의 마지막 벚꽃이 지는 나무 아래서

문득 생각한다

이 봄과 이 나무 사이만큼의 밀어도 없이

꽃잎처럼 훨훨 날려본

가벼운 웃음도 없이

봄을 보내는 하루

뼈를 겉으로 입은 듯

부끄럽고 아픈 하루를 보내는 봄날

서럽고 사무쳐

꽃잎을 줍다가 생각한다

내년에도 신은 또

봄의 모래시계를 다시 거꾸로 세워줄 것이다.

새 벚꽃은 피고

지고

나는 똑같은 봄을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흘러가겠지만

그 다음해에도 신은 또,

 

 


 

 

이운진 시인 / 빈방 있나요

 

 

방 하나를 갖고 싶어요

주소도 없고

어떤 후일담도 도착하지 않는 곳

벽에는 못자국이 없고

구석에는 우는 아이가 없고

문 앞에는 딱 한 켤레의 신발만 있는 곳

잘 손질된 폐허 같은

빈 방이 있으면 좋겠어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하루가 가고

젖은 성냥을 그어대는 밤

내 등뼈의 램프에 불을 붙이고 잠든

당신들의 꿈 보다 멀리

가고 싶어요

잠긴 집 안의 정원보다

열린 방 한 칸의 어둠이

따뜻해 보이는 곳

바위를 깎아

그 안에 만든 방이라면 더 좋아요

부서진 봄 여름 가을 겨울

나와 나 자신과 단 둘이 살

그런 빈방 있나요

 

 


 

이운진 시인

1971년 경남 거창 출생. 동덕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석사 졸업. 199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톨스토이 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에세이집 『시인을 만나다』 『고흐 씨, 시 읽어 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