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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현 시인 / 이른 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7.
박수현 시인 / 이른 눈

박수현 시인 / 이른 눈

 

흰 눈이 세상을 덮었네요

117년 만이래요

흰 눈송이들을 왕창씩 가불받았나 봐요

아직 11월, 올해 세상을 뜬 사람들

폰 번호는 아직 지우지 못했는데

대차대조표도 없이 흰 눈이

왕창씩 퍼붓고 있어요

쏟아지는 눈발을 뒤집어쓴

아파트 놀이터 저 단풍나무 좀 보세요

무슨 기막힌 봉변이라도 당한 듯

발간 볼을 더 새뜻이 붉히네요

아이들은 장갑도 없이 즐겁게 눈을 뭉치네요

곧 녹아 무너질 허드레 눈사람

걱정 따윈 하지 않기로 해요

괜찮아요, 저렇게 서두르긴 해도

이왕 온 김에 며칠 유숙하다 가면 또 어쩌겠어요

저렇게 풍경 하야라히 지우며

은성(殷盛)하며 흰 눈 내리네요

지금은 손톱에 봉숭앗물 따윈 들이지 않지만

젊은 날의 첫눈 어린 순한 추억과

반쯤 지워진 그 손톱의 삼삼한 꽃물도

이런 날은 차마 눈부실 것 같아요

​​

-계간 『문학청춘』 2025년 봄호 발표

 

 


 

 

박수현 시인 / 흰빛에 대한 사소한 견해

 

 

 누가 초여름에게 흰빛을 초대하라 했나 목련, 조팝, 찔레, 꽃사과, 귀룽나무에 잇달아 초여름 은목서, 산사, 백당, 때죽, 층층, 쥐똥, 이팝나무들의 저 눈부신 흰빛 꽃송아리들! ‘흰’의 입자들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소용돌이친다 흰’의 범람이다 이누이트족은 일곱 가지, 인도 산스크리크 문헌에는 열 가지, 일본에서는 흰색을 눈의 설백(雪白), 우윳빛이 나는 것은 유백(乳白), 회색이 도는 회백(灰白), 푸른 기를 띤 청백(靑白), 쌀알처럼 따듯한 미백(米白) 등으로 나눈다 한다

 

 어떤 이는 설백(雪白)을 최고의 흰빛이라 치지만 나는 아무래도 유백(乳白)이지 싶다 유백(乳白)만큼 뭉근하고 깊고 따스한 빛이 있을까 유백(乳白)만큼 기쁨을, 슬픔을 그리고 어려움을 견뎌낼 힘을 조곤조곤 펼쳐낼 수 있는 빛깔이 있을까 유백(乳白)은 이 지상의 포유류만 누릴 수 있는 빛이라 태초엔 아기처럼 기다가, 자박자박 걸음마를 떼다가, 마침내 뛰게 하는 곡진함이 있다 신들이 산다는 티벳 하늘 호숫가 어미 야크의 뽀얀 젖줄 한 줄기가 꺼질 것 같은 새끼의 숨결을, 얼어붙은 동토에 움을 틔우게 하는 일필휘지 기운을 지켜본 적이 있다 ‘유백(乳白)’엔 어미 젖 한 모금 빨다 반짝이는 아기 눈빛 속 평온이 흐른다 세상 모든 외로운 것들의 뱃구레를 채울만한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초여름 공기 중 흐드러진 유백(乳白)에 젖어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도 그만 용서해야 할 것 같다

 

-년간  『빛의 안부』 2025년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박수현 시인

1953년 대구에서 출생. 본명: 박현주.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샌드페인팅』 등.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2020년 제4회 동천문학상수상. '溫詩' 동인. 《시안》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