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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변종태 시인 / 은행나무 아래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9.
변종태 시인 / 은행나무 아래서

변종태 시인 /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변종태 시인 / 수평선에 걸린 꽃잎

 

 

왼쪽 다리에 깁스하고 보니

창가의 제라늄이 삐딱하게 누워있다.

지구의 중력을 잊고 산 듯

허공은 상처 없는 통증을 밀어 올린다.

한 발 디딜 때마다 꽃잎이 출렁 차례로 넘어진다.

뼈가 부러진 자리엔 제라늄의 붉은 입술이 항유(香油)처럼 번진다.

왼쪽 다리를 허공에 띄운 채 지는 꽃잎을 읽는다.

잡힐 듯 말 듯한 수평선 너머의 시간들,

지나간 상처는 모두 허공에 머무는 것이라고

네게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수직의 벽마저 수평선을 꿈꾸는지

목발을 기대놓은 벽이 출렁거린다.

그 때마다 네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수평선 너머 네가 일어섰다, 앉았다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뜨린 허공의 시간들

네게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제라늄 붉은 꽃잎 하나 툭,

 

 


 

변종태 시인

1963년 제주에서 출생. 제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 『안티를 위하여』 『미친 닭을 위한 변명』 등. 논문 『미당 서정주의 초기시 연구-화자,화제,초점을 중심으로 』. 현재 제주문인협회 회원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 계간문예 『다층』 편집주간. 여자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