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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시인 /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변종태 시인 / 수평선에 걸린 꽃잎
왼쪽 다리에 깁스하고 보니 창가의 제라늄이 삐딱하게 누워있다. 지구의 중력을 잊고 산 듯 허공은 상처 없는 통증을 밀어 올린다. 한 발 디딜 때마다 꽃잎이 출렁 차례로 넘어진다. 뼈가 부러진 자리엔 제라늄의 붉은 입술이 항유(香油)처럼 번진다. 왼쪽 다리를 허공에 띄운 채 지는 꽃잎을 읽는다. 잡힐 듯 말 듯한 수평선 너머의 시간들, 지나간 상처는 모두 허공에 머무는 것이라고 네게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수직의 벽마저 수평선을 꿈꾸는지 목발을 기대놓은 벽이 출렁거린다. 그 때마다 네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수평선 너머 네가 일어섰다, 앉았다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뜨린 허공의 시간들 네게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제라늄 붉은 꽃잎 하나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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