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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란 시인 / 통속적 하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0.
박소란 시인 / 통속적 하루

박소란 시인 / 통속적 하루

 

전화를 걸지 못했다

9층 사무실 창으로 내려다본 바깥 풍경이 탄식하듯 저무는

이 저녁의 낙막을 나는 그저 방관하기로 한다

눈 주는 곳마다 노을은 무너지고 순하던 잎사귀 화염처럼 치솟아

죄는 깊어가는데 사랑의 죄 사랑할 수 없는

한그루 은행나무

제 바로 곁에 병든 짝을 세워둔 저 맹목한 사내를

뿌리째 흔든다 한들 우리 계절은 너무나 뻔하고 뻔한 것이이서 결국

구린 열매 몇알 빈 가슴을 탕진하고 말 뿐

거리는 온통 멀어지는 뒷모습들로 가득해

누구든 어디든 붙잡고만 싶어

퇴근을 놓치고 선 하늘의 망연한 얼굴만 들여다볼 때

이대로 잠시 앓기로 한다

단지 오늘만, 끝으로

보고 싶다 한마디가 몰고 온 이 하루의 고약한 병증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에서

 

 


 

 

박소란 시인 / 아현동 블루스

 

부랑의 어둠이 비틀대고 있네 텅 빈 아현동

넋 나간 꼴로 군데군데 임대 딱지를 내붙인 웨딩타운을 지날 때

쇼윈도우에 걸린 웨딩드레스 한 벌 훔쳐 입고 싶네

천장지구 오천련처럼 90년대식 비련의 신부가 되어

굴레방다리 저 늙고 어진

외팔이 목수에게 시집이라도 간다면 소꿉질 같은 살림살이라도 차린다면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하겠네

신랑이 어줍은 몸짓으로 밤낮 스으윽사악 스으윽사악

토막 난 나무를 다듬어 작은 밥상 하나를 지어내면

나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시를 쓰리 아아 아현동,으로 시작되는

주린 구절을 고치고 또 고치며 잠이 들겠지

파지처럼 구겨진 판잣집 지붕 아래

진종일 품삯으로 거둔 톱밥이 양식으로 내려 밥상을 채울 것이네

날마다 우리는 하얀 고봉밥에 배부를 것이네

아아 그러나 나는 비련의 신부, 비련의

아현동을 결코 시 쓸 수 없지 외팔의 뒤틀린 손가락이

식은 밥상 하나 온전히 차려낼 수 없는 것처럼

이 동네를 아는 누구라도 끝내 행복할 수는 없겠네

영혼결혼식 같은 쓸쓸해서 더욱 찬란한 웨딩드레스 한벌

쇼윈도우에 우두커니 걸려 있고 그 흘러간 시간의 언저리

도시를 떠나지 못한 혼령처럼 서 있네 나는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에서

 

 


 

박소란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2015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노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