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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은섭 시인 / 궁세체의 여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0.
심은섭 시인 / 궁세체의 여자

심은섭 시인 / 궁세체의 여자

 

 

허기에 찬 굴둑에 저녁연기를 피워 내려고 그녀는

겨울나무처럼 서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불현듯 얇아진 귀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사치와 부귀를 초서체로 써 보았지만

풀잎처럼 흔들릴 뿐,

붓끝에 젖은 먹물보다 봄은 더 어두워만 갔다

반칙은 타락을 낳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다시 진지한 생의 획을 그어 보려고

빈 들판으로 나가 새의 발자국을 주워 오거나

사랑가를 부르다 죽은 매미들의 목록을 찾아 나섰다

달빛이 수수밭에 벗어 놓고 간

유행을 타지 않은 푸른 새벽을 데려오기도 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에 예정된 상견례로

궁핍과 정중한 악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삼색 볼펜으로 밤의 수염을 그리지는 않았다

은자령에 뭉게구름이 걸어놓은 자유 한 벌이나

보릿고개를 넘다 해산한 대추나무의 꽃잎 한 장도

탁발하지 않았다

어둠에 그을린 달의 영혼을 닦아 주려고

새벽마다 화선지에 천 그루의 사과나무를 그렸다

 

그녀가

한평생 눈물을 찍어 쓴

궁서체 편액 한 장이 오래도록 내 몸속에 걸려 있다

 

-시집 <물의 발톱>천년의 시작, 2024년 에서

 

 


 

 

심은섭 시인 /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

 

 

 그곳에 가만히 내 몸을 뉘어본다 천정엔 물병자리 별빛이 한가롭다 벽화엔 살구나무가 산모처럼 몸을 푼다

 

 주인을 잃은 천마는 천상을 호령하며 자작나무 껍질 위로 말발굽을 내딛지만 돌무지 널 속 왕관은 깊은 잠에 취해있다

 

 굴삭기가 동굴의 옆구리를 찍어도 해머가 목관 속의 침묵을 으깨어도 성골인 까닭으로 그는 깨어날 수 없다

 

 시간을 살해해야 살아남는 역사는 결단코 뒤돌아보지 않는 표독한 습성을 지닌 한 마리의 맹수였다

 

-시집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에서

 

 


 

심은섭 시인

1957년 강원도 강릉시 출생. 2004년 《심상》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詩부문 당선. 2006년 《시와 세계》 겨울호에 〈문학평론〉 당선. 시집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가문비 나무엔 허파가 없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표정과 불온성』 『상상력과 로컬시학』, 2018. 제60회 강원도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박인환 문학상 수상.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한국경영문화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