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은섭 시인 / 궁세체의 여자
허기에 찬 굴둑에 저녁연기를 피워 내려고 그녀는 겨울나무처럼 서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불현듯 얇아진 귀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사치와 부귀를 초서체로 써 보았지만 풀잎처럼 흔들릴 뿐, 붓끝에 젖은 먹물보다 봄은 더 어두워만 갔다 반칙은 타락을 낳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다시 진지한 생의 획을 그어 보려고 빈 들판으로 나가 새의 발자국을 주워 오거나 사랑가를 부르다 죽은 매미들의 목록을 찾아 나섰다 달빛이 수수밭에 벗어 놓고 간 유행을 타지 않은 푸른 새벽을 데려오기도 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에 예정된 상견례로 궁핍과 정중한 악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삼색 볼펜으로 밤의 수염을 그리지는 않았다 은자령에 뭉게구름이 걸어놓은 자유 한 벌이나 보릿고개를 넘다 해산한 대추나무의 꽃잎 한 장도 탁발하지 않았다 어둠에 그을린 달의 영혼을 닦아 주려고 새벽마다 화선지에 천 그루의 사과나무를 그렸다
그녀가 한평생 눈물을 찍어 쓴 궁서체 편액 한 장이 오래도록 내 몸속에 걸려 있다
-시집 <물의 발톱>천년의 시작, 2024년 에서
심은섭 시인 /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
그곳에 가만히 내 몸을 뉘어본다 천정엔 물병자리 별빛이 한가롭다 벽화엔 살구나무가 산모처럼 몸을 푼다
주인을 잃은 천마는 천상을 호령하며 자작나무 껍질 위로 말발굽을 내딛지만 돌무지 널 속 왕관은 깊은 잠에 취해있다
굴삭기가 동굴의 옆구리를 찍어도 해머가 목관 속의 침묵을 으깨어도 성골인 까닭으로 그는 깨어날 수 없다
시간을 살해해야 살아남는 역사는 결단코 뒤돌아보지 않는 표독한 습성을 지닌 한 마리의 맹수였다
-시집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방민호 시인 / 옥탑방 외 1편 (0) | 2026.01.30 |
|---|---|
| 유정이 시인 / 내출혈 외 1편 (0) | 2026.01.30 |
| 김윤진 시인 / 평안을 위하여 외 1편 (0) | 2026.01.30 |
| 최연수 시인 / 의심이라는 병 외 1편 (0) | 2026.01.30 |
| 장인수 시인 / 걸레질 외 1편 (0) | 202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