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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림 시인 / 비둘기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1.
이경림 시인 / 비둘기들

이경림 시인 / 비둘기들

 

 

네 식구였다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을 훑고 다니고

하나는

안전선 밖에서 종종거라고

하나는

뜨거운 레일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푸득

날아 건너편으로 가고

 

하나는

제 집인듯한

전철 플랫폼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빠알간 맨발이었다

 

 


 

 

이경림 시인 / 神들의 도매상

-가방 도매상에서

 

 

신들이 산더미로 쌓여 있었다 속을 긁어낸

악어 물소 장어 산양 늑대 돼지들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가방이 된 신들의 빈속을

누군가 신문으로 채워 넣고 있었다

 

네모난, 둥그런, 쭈글쭈글한, 번쩍번쩍한,

온갖 색깔의 신들은

트럭에 대량으로 실려 가기도 하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여인들에게

하나 둘 팔려가기도 했다

 

어떤 여인이 신들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 이거 더 싸게 안돼요?

주인이 앙칼지게 신들을 뺏어 제 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 여긴 도매상 이예요

 

때로 제 무게를 못이긴 신들이 와르르 쏟아지기도 했다

그 골목으로 커피장사가 지나가고 국밥장사가 지나가고

짐꾼이 지나가고 일수쟁이가 지나가고

지나가는 동안

남은 신들은 죽은 듯 박혀 있었다.

 

- 이놈의 불경기는 언제 끝나나

 

천년이 하루였다

 

- <'현대시학 '신작소시집> (2007년 8월호)

 

 


 

이경림 시인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계간 《문학과 비평》을  통해 〈굴욕의 땅에서〉외 9편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 먹자』 『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산문시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평집 『관찰의 깊이, 사유의 깊이』. 제 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제1회 윤동주서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