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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신 시인 / 폭설 아침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1.
문신 시인 / 폭설 아침

문신 시인 / 폭설 아침

 

한 점 눈송이가 이마에 닿던 저녁이었다

한 그릇 국수를 뜨겁게 말아 들고 찬 마루에 앉으니

먼 숲에서 발목 굵은 짐승 소리가 우레우레 건너왔다

먹장 같았다

초저녁에

아래채 늙은 총각이 손바닥에 투투 침을 뱉으며 와서는

이 빠진 도끼를 빌려 갔다

눈발이 굵어지더니

덫을 놓듯 골짜기마다 희고 단단한 발자국을 눌러 놓았다

씩씩 도끼날 벼리듯 문풍지도 긁어댔다

이런 날에는 아침이 이르고 맑고 나지막하다

어느 틈에 가져다 놓았는지

헛간에 기대 놓은 도낏자루에 몇 점 짐승의 피가 식어 가고 있었다

눈을 돌리니

아래채가 털 굵은 짐승처럼 꿈틀대는 것도 같았다

어머니가 가벼운 아침을 차려 내올 때

늙은 총각이 주섬주섬 뒷간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모처럼 뜨거운 고깃국을 뜨는데

폭설 같은 울음이

올가미처럼 목을 꽉 죄여 오는 것이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에서

 

 


 

 

문신 시인 /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

 

 

 해 뜨지 않는 날이 백 일간 지속된다면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비가 오면 심장까지 축축하게 젖도록 시를 읽을 것이다 도둑인 줄 알았다고 누군가 실없는 농을 걸어 오면 나는 벌써 시를 이만큼이나 훔쳤다고 쌓아 둔 시집을 보여 줄 것이다 또 누군가 나를 향해 한 마리 커다란 벌레 같다고 한다면 시에 맹목인 벌레가 될 것이다 야금야금 시를 읽다가 별빛도 달빛도 없이 내 안광으로만 시를 읽다가 마침내 눈빛이 시들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면 사흘이고 열흘이고 시를 새김질하다가 살구나무에 계절이 걸리는 것도 잊고 또 시를 읽을 것이다 그렇게 시를 읽다가 살구꽃 터지는 날을 골라 내 눈에도 환장하게 핏줄 터지고 말 것이다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에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문신 시인

1973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학과 졸업.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작은 손〉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물가죽 북』. 현재 전라북도 마음 사랑병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