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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효은 시인 / 이름의 형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1.
김효은 시인 / 이름의 형식

김효은 시인 / 이름의 형식

ㅡLovebug

 

여름은 마지막 탈의실을 개장했다

입장과 자격에는 언제나 걸맞는 옷이 필요하고

낡은 옷을 벗고 진피층의 기억까지 모조리 벗겨내면

비로소 드러나는 검은 융단의 새 옷

유유히 날아오르는 자의 날개와 유유히 날아오르는 자의 날개가 만나

바람과 중력을 역행하며 날아오른다

한 계절을 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새로운 천사는 이렇게 조합으로만 탄생한다는 듯이

그러나 결합과 동시에 비행모드는 재빠르게 재조율되어야 한다

불시에 날아드는 장애물과 폭풍우와 온갖 잔재들

머리와 머리는 최대한 멀리 둘 것

전방과 후방을 반원과 반원의 각도만큼 각자의 위치에서 주시할 것

원활한 호흡과 주행을 위해 키스는 배제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은 눈을 감아도 무방하다

교대로 기어를 작동하거나 자율주행인 양

한쪽에게 일임하고 쉬는 것이 저항성을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암묵의 신호를 꼬리와 꼬리를 비벼 교환할 것

하나라도 살아남을 것 그러나 결국엔 전멸

 

너의 오른발과 나의 왼발을

붕대로 한데 묶고

생활이라는

일상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나아가던

매일 반복되던 그 계절을 기억한다

승패가 없었던 게임

체온과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고

한 호흡으로 숨 쉬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설렘은 지리멸렬이 되고 매혹은 증오가 되어

결국 과호흡과 무호흡을 반복하다가

얽히고설켜 넘어지고 말았지만

깨진 무릎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묶인 발에서 해방된 자유를 반기며

쾌재의 노래를 불러댔지

일상의 부식토를 털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던

그날 그 커플들의 상쾌했던

탈의와 환복을 기억한다 기억하니

여름은 언제나 마지막 탈의실을 개장하고

새로운 사랑을 하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그날의 새 옷도 새 날개도 이제는 다 낡고 헤졌겠지만

하나였던 그 둘은 이제

각자의 여행지에 무사히 잘 도착했을까

각자의 결실을 맺었을까

 

서울 현재 기온 35도 습도 86%

붙어 있기에는 숨 막히는 절박한 날씨가

붙어 있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고

최초이면서 최후가 될 완벽한 비행의 조건이 된다

이토록 아찔하고 허술한 비행의, 예식의 서막

어쩌면 털파리들이 털파리들에게로

미래를 전달하는 숭고하고 거룩한 유산인지도 몰라

두 개의 몸으로만 전달하는 하나의 문자

교미와 번식이라는 기표가 하등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각기 다른 유(類)와 종(種)이 이룩하는

사랑의 모양과 형식일 뿐 어쩌면 종교와도 같은 것

문명을 이어가는 비밀스러운 암호 같은 것

 

섬 하나가 허공을 날고 있다

한 무리의 어둠

한 무리의 붉은 섬광이

도시를 공중을 휩쓸고 나흘 만에 사라졌다고 한다

사멸하지 않을 투명한 지뢰를 곳곳에 살포하고 떠났다고 한다

멸종은커녕 아열대의 여름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고

내년엔 한층 북향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저기 늦깎이 노숙자 연인이 하수구 한켠에

69자세로 포옹한 채로 누워 있다

붉은등우단털파리와 붉은등우단털파리가 엉겨 붙어 있다

여기 러브버그가 있다

영원히 인멸되지 않을 증거처럼

​-계간 『시와 징후』 2025 가을호 발표

 

 


 

 

김효은 시인 / 십년 후의 아들에게

 

 

아들아

오늘 넌 넘어졌구나

괜찮아 누구나 넘어지곤 해

 

아들아

오늘 넌 화가 났구나

괜찮아 누구라도 그래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겨내면

너의 잎새는 더욱 푸르르고

너는 탄탄한 나무가 된다는 것을

더 지혜롭고 용감한 청년으로 꽃피게 될 거야

너의 너른 품새와 네게 열린 열매들이

세계의 그늘과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따스히 드리우길 엄마는 기도한다

 

지금의 네가 미래의 너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엄마는 지금 이대로의 너를

가장 사랑하는

엄마는

 

 


 

김효은(金曉垠) 시인

1979년 전남 목포 출생,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2010 계간 《시에》 평론 등단. 저서 『아리아드네의 비평』 『비익조의 시학』이 있음.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강사이며 웹진 『시인광장』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시와 산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