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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시인 / 부신(符信)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 1
불 속에서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검은 씨앗을 던진다 죽은 자의 입을 벌려 채워 넣던 엽전들 혹은 아린 곳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 자신의 마음과 가장 닮은 조약돌을 죽은 자의 입에 넣어주던 풍습
그대라는 밤바다의 크기, 막 알에서 깨어난 거북이의 눈 소멸하는 쪽에서 내가 길게 자라나고 있다
바람이 바위를 움직인다 어제 형을 봤어요 산에서 도를 닦았다 욕조가 깨졌다 번지점프를 했다 바다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새들은 별들이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사실에 뻐꾹, 뻐꾹 탁상시계처럼 울었다
꽃은 없고 향기만 피어났다 향기가 맺힌 곳마다 오래된 무덤들이 열렸다 한없이 푸른 잎맥을 배경으로
오른손과 왼손을 부비면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들이 강물 속의 조약돌 하나 만월 하나 베어 물고 있었는데 누가 조약돌 속에서 향을 피우는지 물결 가득 은비늘로 반짝인다 가을비가 타들어간다 망자(亡者)를 만나기 위해 선사시대의 제사장들은 흰 두루미의 깃털을 부신(符信)으로 사용했다
조약돌을 가슴에 안고 꽃이 진다 소금이 반짝인다 거기쯤에서 의미도 사라졌다 그대도 떠도는 그대를 알지 못하리
세상의 꽃들이 태양을 품고 피어오를 때 그 중심에 강의 조약돌을 올려놓는다 꽃잎이
하나하나 조약돌의 흐름을 만져본다 구두 밑창이 다 닳아 발가락이 빠져나온 꿈 아련하게 붉은 숨결이 전해진다 손금 위에 조약돌을 올려놓자 시공(時空)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린다
—《시인세계》2011년 가을호
최승철 시인 / 채근담을 읽는 겨울밤 2
눈이 내린 대지의 중심에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검은 고양이가 푸른 눈의 광채로 냉기를 노려보고 있다 혹한 속에서 안간힘을 다하는 정신의 구도(求道)에 대해 (사람의 마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듯 살아간다면 모 든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채근담의 뜻)(홍자성은 1600년대 명나라 사람이라는 약력만 전해질 뿐 입신양명하지 못했다)(겨울밤 중성화 수술을 당한 고양이는 입을 벌릴 뿐 울지 못했다) 텅 빈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결빙 속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좌우로 흔든다 (빙하에 잠긴 나무는 썩지 않는다)(그러나 악법은 고 쳐야 법이 된다)(재개발 주택단지에서 고등학생들이 한 아이를 때리고 있다) (골이 깊으면 산봉우리가 높다고 했던가)(15C 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콜럼버스 일행에 의해 매독이 유럽에 퍼졌다 한다) 눈발을 뚫고 걸어가는 꿈속에서 나는 다짐할 때마다 눈송이를 향해 주먹질을 했을 것이다 (차간호의 어부들이 얼음 밑으로 그물을 넣어 생선을 포획하듯,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가슴에서 꺼내었다) (영하 30도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들은 혈관이 터져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헤어진 애인의 안부 문자처럼 스마트 폰 불빛을 내 심장 쪽으로 잡아당겼다)(죽음은 삶을 호명하지 못한다) 풍경(風聲)속에 매달린 물고기가 혼들린다 은행나무에서 수천 개의 은행잎이 노랗게 지느러미를 흔든다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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