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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웅 시인 / 겨울비 겨울 숲에 비가 내립니다. 숲에 사는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관중이던 눈들이 녹습니다. 숲에 사는 짐승들의 발자국을 하나 둘 세고 안부를 확인하려 내렸던 눈은 이제 빗물을 타고 저 아래 계곡쪽으로 흘러갈 것이고 불어난 물에선 발굽들이 뛰는 소리가 날 것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마치 나뭇가지들마다 새 움이 트는 소리 같습니다. 여름비는 식물들의 뼈가 되지만 겨울비는 나무들을 깨우는 날짜들이 됩니다. 사계절이 들렀다 가는 숲 숲이 크고 세세한 달력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저 봄으로부터 걸음을 재면서 온 빗방울들 덕분입니다. 풀씨들에게, 봄까지 몇 걸음 남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 숲의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듯 새들이 정성들여 지은 둥지속에선 날짜들의 포란抱卵이 시작될 것입니다. 숲의 봄은 겨울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ㅡ계간 《시인시대》 (2024, 봄호)
박무웅 시인 / 시작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에게 주어진 시작과 끝의 횟수가 동일하지 않다는데 내겐 시작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끝이 더 많았을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궁금증을 뒤져보면 남아있는 끝의 개수는 알 수 없고 다만 시작은 꽤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작은 지금 당장 실행해도 될 것 같고 또 어떤 시작은 때를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새로 발견한 시작 하나를 들고 이 봄밤을 잠 못 이루는 것이다 지나온 생을 돌아보면 험난했던 시작들과 영예로웠던 끝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시작을 찾고 또 찾는 것이다 끝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다 팽팽하고 질긴 시작 하나를 골라서 시위를 매고 힘차게 당겼다 놓으면 시작은 저 멀리까지 순식간에 날아가 꽂힌다. 나보다 더 나를 앞질러가는 끝을 저 멀리까지 보내놓고 나는 또 천천히 그곳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모든 가을은 봄에서 시작되었고 또 모든 봄은 겨울에서부터 걸어온 것이니 꽃피는 일을 시작하고 열매 따는 끝을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두근거리는 시작 하나를 골라 들고 오랜 궁리를 싹틔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와정신』 (202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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