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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임 시인 / 밤의 문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
서정임 시인 / 밤의 문장

서정임 시인 / 밤의 문장

 

 

블랙 아이스를 밟았다

속도를 놓쳐버린 시간이

사정없이 미끄러지는 중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익명을 자처한 얼굴은 알 수가 없다

아는 얼굴이거나 모르는 얼굴이거나

눈송이 같은 문장을 쓰는 얼굴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얼굴

 

문장에 문장을 단 댓글은 냉혹함이었다

무차별 대중을 향한

이유 없는 분노를 휘두르는 칼끝의 번뜩임이었다

 

급브레이크를 걸었던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다

눈앞이 캄캄해진 한 영혼의 발목을

무참히 자르고 지나가는 비명悲鳴

 

시원하게 내달리는 속도를 내주는 길은

언제 어디서나 한 번쯤 급속한 감속 운행을 요구한다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대책 없는 시간이 문장을 내린다

게재했던 문장을 무참히 내리쳤던 저

흔적 없이 사라지는 편향된 경도

 

막혔던 길이 뚫린다

그 신 없는 신앙 같은 블랙 아이스가

비명悲鳴을 세웠던 자리에

또다시 쌓이는 눈송이 같은 댓글들

 

 


 

 

서정임 시인 / 미세먼지를 날리다

 

 

낚시 바늘에 걸렸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아가미 걸린 눈앞이 뿌옇다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드높다

집 전화기 속에서 간절히 나를 부르는

 

내가 딸려간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떨리고 호흡이 가팔라지는 폐부

우리는 때로 메꽃과 나팔꽃의 명확한 구분 앞에 혼동하기도 하는가

 

휩싸인 미세먼지 속에서도 익숙했던 길과 나무가 보이고

 

후크를 누른다

이내 그 단호함 속으로 밀려드는 정적

마스크를 쓴 듯 터져 나오지 않는 음성이 딸의 안부를 묻는다

스마트폰 속에서 밝고 맑게 들려오는 목소리

 

견고히 닫아두었던 문이라 생각했던 문틈을 비집고 들어선

미세먼지에

일평생 모아둔 돈을 한꺼번에 날렸다는 어느 노인을 말하던 친구는

국세청이라는 한마디에

통장비밀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고스란히 불러주었다던가

 

깊은 숨을 내쉰다

허공에는 딸 아닌 딸이 딸을 가장한

미세먼지들이 떠돌고

그 낚시 바늘에 걸린 울음소리들이 뜨겁다

 

 


 

서정임 시인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2006년 《문학·선》으로 등단. 2012년 문예진흥금수혜. 시집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 『아몬드를 먹는 고양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