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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지아 시인 / 플라나리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3.
심지아 시인 / 플라나리아

심지아 시인 / 플라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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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플라스틱 통에는 흰 알약이

스티커는 버려졌다

망가진 것들을 공들여 고쳐보는 주의 깊은 손

가지런한 치아를 혀끝으로 쓸어보는 일

케이크 시트를 하얀 크림이 덮어간다

케이크들이 차가워진다

환한 뼈

눈이 부셔서 피부로 덮어놓은

사람들이 차가움을 사 간다

실험 시간에는

하나에서 하나를 길게 갈랐다

토막토막 자르는 손도 있었다

눈썹 사이 공간

촘촘하게 접힌

음악들의 이상한 너비를 듣는다

아무 데서나 눈을 감고 싶다

하지만 여분의 눈동자

유리 벽에서 높낮이를 고른다

안을 밀면 부드러운 세계에 대한 예감

부드러워 보이는 일이었고

부드러움이 분열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무서웠다

조금도 무섭지는 않았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아 시인 / 모국어는 끝나지 않는다​

 

일요일에는 주머니가 많다

잔디는 발을 숨긴다

잔디를 닮은 카펫을 그린다

거실이 죽은 듯이

생기롭다

*

끝에게도 끝이

그런 것이 필요할까

*

어린이에게는 두서가 없다

발을 모두 숨겨서 풀을 따라잡을 수 있다

*

가장 느린 동물을 사랑해서

우리가 나누는 사랑에는

사랑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속도가 가시적으로 줄어들고

비가시적인 속도는 시선의 고장 같다

잦다와 친숙하다는 구별되는 사물이다

잦은 고장에 친숙하다

그것은 고통이 결여된 문장인가 고통을 포함한 문장인가

고통이 길들여진 문장인가

어린이에게는 두서가 없다

*

네가 아직 기계였을 때에도

너를 이루는 금속들이 풍부해서

너는 내게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다정이었지

*

서랍의 질서는 무구하다

그런 사랑은 어딘가 심하게 흐트러져 있다

*

내게 어울리는 속도를 고안하다가

속도를 잊어버렸다

나는 내게 낯선 얼굴이다

그것은 내가 내게 갖게 된 의견의 전부다

​*

 

전체가 다 담기고도 공간이 너무 많아서

주머니의 시간은 희소하게 풍부해진다

 

*

아무것에도 싸여 있지 않을 때

피부는 가장 예의 있게 보인다

 

 


 

심지아 시인

1978년 전북 익산 출생. 아주대학교 경영학부 졸업.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로라와 로라>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