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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지우 시인 / 말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2.
박지우 시인 / 말희

박지우 시인 / 말희

 

 

기억의 밀도는 촘촘해진다

쏟아지는 생각에 젖어 파랗게 내리는 비를 그려 넣는다

푸른 문장이 허공에 사선을 긋는다

비의 가장자리가 낡은 시계처럼 절뚝거린다

그리움이 시작된 생각 밖의 오후가 젖은 어깨를 토닥이며 너를 건너간다

 

개 한 마리 낭떠러지 쪽으로 뛰어간다

한쪽 뒤꿈치가 닳은 목소리를 끌고

 

고양이플라워를 흔들며

철없는 깃발로

표류하는

이파리가 없는 계절의 눈빛들이 미끄러진다

 

말희, 심장근처에는 기차역이 있어

 

두 시의 표정에서는 손가락을 펴지 못한

황매화가 기지개를 켜는

거꾸로 누운 하늘로 퐁당퐁당 뛰어드는

십자가는 높이높이 날아오르고

홀로 서 있는 전화 부스 속으로 묵은 시간이 굴러간다

 

말희, 네 불룩한 호주머니의 하루는 얼마나 동그랬던지

 

네 손가락에 걸린 구름의 등이 울컥울컥

노랗고 파란 사각형의 기억을 파먹으며 가깝고도 멀리

 

다섯 번째 계절에서 와 부서져 내린

네 착한 손에서는 사투리냄새가 나지

 

바람이 머뭇거리는 거울 속으로

빗물이 출렁인다

 

-2016년 『시로 여는 세상』 여름호

 

 


 

 

박지우 시인 / 시츄의 집 쪽으로

 

 

 빈집에는 어떤 서사도 없다

 

 해의 누르께한 손가락이 거실을 만진다.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는 정육면체

 숫자반을 돌리는 시곗바늘이 그 그 그 못에 비끄러맨 고요 속으로 산(算)가지들이 주렁주렁

 

 사물들의 심쿵 소리

 

 주방 한쪽에서는 감자 써는 소리, 무지 털렸어, 목이 쉬고

 

 누런 이빨의 햇빛에 직육면체의 빈 어항속 물고기가 새도복싱을 할 때 화분은 초록의 목소리를 쏘아 올린다.

 

 레쓰비 한 잔, 그리고 말보로 레드

 

 게르를 흉내 낸 시츄의 집 쪽으로 언뜻 비치는 롱테이크 목소리

 

 모과가 가늘게

 아주 느린 걸음으로

 노랑에서 검정 쪽으로 기울어지는 선이 약한 도형

 

 집을 채울 수 있는 삶은 없다

 

-계간 《시》 2022년 가을호에서

 

 


 

박지우 시인

충북 옥천에서 출생. 2014년 《시사사》 로 등단. 시집 『롤리팝』 『우산들』. '현재 ‘시시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