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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진 시인 / 야생의 책 젖을 물린다 방심한 짐승의 눈빛으로 달큰한 젖내에 겨워 가장 작고 예민한 입술의 애무를 받으며 나는 꽃피우는 기계 이성이 마비된 울창한 책 한 번도 읽지 못한 아무도 펼치지 못한 무한한 페이지 인류 문명의 근원보다 위대한 생명의 발상지 육덕한 젖줄기가 골짜기를 타고 대지에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나는 쓴다 월식의 완전한 어둠과 늑대 울음소리 나의 침대는 암흑의 시간을 잉태한 채 흐르고 흘러 어디에서나 머물고 아무 곳에도 없다 게르에서 잠을 깬 아침 젖을 빨며 울고 있는 너는 내 아들인가 아비인가 야생 커피 한 잔과 마유주 한 모금은 순록의 뿔처럼 단단했던 몸을 녹여 주었고 차가운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즙액 백야의 자궁 같은 뭉근한 백일몽 북극여우는 만년설에 할례를 마쳤고 생장이 멈춘 채 눈 속에 묻혔다 사막은 내부의 허무를 확장해 푸른 이파리의 나무들을 산 제물로 삼켰고 첫 발정이 마지막 발정이 되는 순간 산란하지 못한 물고기의 부유하는 정액이 물속을 혼미하게 했으나 아무도 멈추는 법을 올랐다 태양의 주기에 생체리듬이 맞추어진 이뉴이트의 발작 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태양의 사제가 된다 우거지는 순록의 뿔 때가 되면 떨어져 나가는 비늘 생장점이 극에 달했을 때 우주는 스스로를 반복한다 순환의 리듬이 세상의 경전을 살찌우는 동안 몸속 유전자의 기억은 피를 흘리며 날고기를 씹는다 무성한 육체의 시간 방심한 두발짐승의 풀어헤쳐진 몸을 더듬는 작은 포유류 한 마리 내 발꿈치를 덥석 문다
문혜진 시인 / 무증상 환자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가서 입을 벌린다 콧속 점막이 헐어있고 목구멍이 부어있네요 열도 없고 기침도 크게 없다면 무증상에 가까워요 물 많이 드시고 잠을 푹 자야 합니다
약을 사고 카페에 간다 아플 때 멀쩡해 보이는 사람, 멀쩡해 보여도 아픈 사람
밤사이 나는 엎드려 있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 두드린다 사뿐히 내 꼬리뼈를 밟고 선반으로 튀어 오른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묵직한 탄성이 등을 후려친다 어둠 속 드리워진 몬스테리아 그림자, 화분 밖으로 드리워진 뿌리가 긴꼬리원숭이 꼬리처럼 그녀를 휘감는다 너 같은 탄소 유발자, 도파민 중독자, 생계형 변종, 소파에 누워 눈치 없이 계산 없이 신생아처럼 깨지 않고 잠을 자고 싶은 날은 잠의 야근 날
침대에 누워 수면 명상을 튼다 생각을 단전에 모은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또렷해지는 시계 초침 소리 배수관 물소리
잠은 어디쯤 있는가 잠은 저항하고, 계속해서 달아나고
한밤의 뉴스 특보
유리창을 깨면서! 비상사태는 지속된다 바리케이트를 쌓는다 헬리콥터가 지나간다 수요도 없고 공급도 없는 재활용 작전 명령, 시위대가 도로를 점령한다, 공포는 지속된다 밤사이 또 다른 명령……열도 없고 기침도 없이 나는 아픈 사람인가 정중하게 잠을 붙잡고, 잠을 뒤집고, 올라타고, 납작 깔리고 뒤집어지고……잠의 대재앙, 잠은 저항하고, 계속해서 달아나고, 나를 피하고, 부정하고, 두들겨 패고, 꼼짝 못하게 하고, 자막이 지나간다 군중들이 차가운 탱크 앞을 막아선다 나는 작전을 바꿔 달아나는 잠의 말벗이 되기로 한다 침대의 가장 안락한 곳에 끌어당겨 잠을 눕힌다, 멱살을 잡는다 잠의 목을 조른다
똑똑, 로켓배송이 온다 -계간 『시와산문』 2025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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