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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새하 시인 / 망각 처방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4.
김새하 시인 / 망각 처방전

김새하 시인 / 망각 처방전

 

 

숲 너머 벼랑이

고고한 척 똬리를 틀었다

숲을 지나는 동안

똬리 풀린 벼랑은 사라지고

길 생기길 바란다고 과연

벼랑이 길을 향해

양보를 내놓을까.

 

우리는 기도한다

돌 틈 약수 바가지로 바닥 긁듯

애타는 한 방울에

그리움 담아 기도한다

 

시간이 바닥나도록

그리워하면 어쩌면 하늘이

돌려줄지도 몰라

끝에 서면 마주할지도 모르는 일

 

누군가 붙여놓은

크기 다른 이름을 가진 하루하루

시간이라는 하나가

여러 개의 톱니 물려 돈다

 

잊고 살아도 흐르는 시간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모자라는 그리움 눈감아 주는

너그러운 시간 속 많은 것을 용서받고

 

낡은 톱니는 출렁다리를 놓고

 

 


 

 

김새하 시인 / 아, 메리카노

 

 

다섯 개의 현이 터진 피아노

침묵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쉽게 일어나고 쉽게 부서지기 어려워

건반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다음을 기다릴 때,

주문은 리스트레토 투샷

 

에스프레소를 가르친 내 앞에

리스트레토를 마시는 남자가 되어 나타났다

 

등에 맨 가방

내려놓지 않는 모습이 보여주는 속내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금방 가야 하는 건 아니죠?’라는 말

“처녀가 딴 원두로 만들었어요”라고 했다

 

불어야 하는 비눗방울액을 빨아먹은 기분

그의 옷에 묻히던 시선을 털어낸다

 

커피 같은 밤이었고

나는 얕은 사람이다

입 가득 토마토를 밀어 넣었다

둘의 크기는 맞아떨어졌다

입술은 한 방울을 흘렸고

혀는 눈을 감았다

 

밤 하나가 지나간다

 

 


 

김새하 시인

경남 마산에서 출생. 본명 김나영. 2017년 ≪시현실≫ 신인상과  최치원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작≫으로 등단. 2017년 시현실 신인문학상 수상. 경남문협, 창원문협, 민들레 문학회 회원으로 활동중. 영남시 동인. 시집  『도망칠 수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