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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향란 시인 / 첫눈처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4.
최향란 시인 / 첫눈처럼

최향란 시인 / 첫눈처럼

 

 

네거리였는데

허공에서 하얗게 내리는 첫눈과 딱 마주쳤어.

떠나야 한다며 가을이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노란 은행잎 손에 쥐고

어서 가라고 인사 하다 들킨 우리는

한 번쯤 계절의 숙명을 부인하고 싶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갈팡질팡했어.

오던 길 하얗게 덮고

가야할 길도 하얗게 덮고

첫눈은 머뭇거리는 운명울 하얗게 덮었어.

가지 말아야 할 길 따위가 없는

막 태어난 네거리, 첫길, 첫눈.

 

 


 

 

최향란 시인 / 눈 덮힌 겨울산에 합장

 

 

마이산 숨이 헉, 황홀하다

내가 서둘러 달려온 이유가 망각의 흰 눈에 빠졌다

 

수직이 아니어도 기어서 당당한 줄사철나무를 만나

나의 차가운 수직의 본능과

신열에 부어올라 들리지 않았던 시간은 헛된 모래시계냐

아직 물음 던지지 못한 아침인데,

 

온 세상에 눈이 내리고 또 내리는데(1)의사지만 시인이고 싶은 지바고

용납 못할 개인의 자유와

얻을 수 없는 그녀를 껴안았던 시인의 얼음 별장

하얀 눈은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휩쓰나니(2)

우리는 다시 흰 빛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은수사 마당에서 깊게 홀린 겨울꿈 헤치고 보니

안과 밖에

온 길과 갈 길에

환히 보이는 그 곳에

유치찬란이라 누락 시켰던 야윈 사랑이 치욕으로 잊었던 자유가

온힘 다해 마이산을 기어서 오르는데

거짓말처럼 다 순하다

 

줄기에서 뿌리 내려 또 시작하는 줄사철나무처럼

완성은 아픈 상처쯤에서 늘 발아했다 말하려 하는가

오늘은 가장 밝은 귀 열어 생 하나 상량한다

 

*1. 2 러시아소설 ‘닥터 지바고’ 중에서

 

 


 

최향란 시인

전남 여수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밖엔 비, 안엔 달』. 여수 해양문학상 시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