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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면우 시인 / 조선문창호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4.
이면우 시인 / 조선문창호지

이면우 시인 / 조선문창호지

 

 

 이 호숫가 오두막의 첫밤, 여편네는 내내 뒤척였다

 조선문창호지 너머 물결도 꾸룩대는 농병아리 일가를 품고 함께 잠 못 들어했다 눈 쌓인 밤은 세상 빛다발 모두어 조선문창호지 그대로 등이다 이마 시린 등이다 가을날은 문살마디 묵은 때 벗겨 산갈대, 마른 수레국화, 은행잎을 새 창호지에 박아넣었다 그 겨울저녁 일제히 수면을 차고 오르는 청둥오리 그 요란한 날개짓에 여편네는 때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오메, 저 통닭 좀 보소 해쌓더니만 봄이 되자 아예 배가 불렀다 추녀는 세 뺨 가웃, 때때로 구름 그림자 옅은 그늘 끄을고 머물다, 찢긴 문풍지 북풍에 놀란 말되어 울다, 지나는 여름소나기에 조선문창호지 아랫도리 다 젖다, 밤안개 새벽이슬에 젖다, 해 뜨면 또 팽팽해졌다 섬에 일군 고구마밭에서 쪽배를 저어 돌아오는 어스름 ,일찍 불켠 우리 오두막 조선문창호지는 그대로 등대다 자꾸 보며 눈시린 천촉광의 등대다 저 그믐밤, 아홉달배기 아들놈이 혼자 깨어 조선문창호지 너머 반딧불따라 첫발자국을 떼다 호수 자옥이 비내리면 기저귀 걸린 방안에서 우리는 함께 젖었다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2001

 

 


 

 

이면우 시인 / 작은 완성을 위한 고백

 

 

술, 담배를 끊고 세상이 확 넓어졌다

그만큼 내가 작아진 게다

 

다른 세상과 통하는 쪽문을 닫고

눈에 띄게 하루가 길어졌다

이게 바로 고독의 힘일 게다

 

함께 껄껄대던 날들도 좋았다

그 때는 섞이지 못하면 뒤꼭지가 가려웠다

그러니 애초에 나는

훌륭한 사람으로 글러먹은 거다

 

생활이 단순해지니 슬픔이 찾아왔다

내 어깨를 툭 치고 빙긋이 웃는다

그렇다 슬픔의 힘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제는 내가 꼭 해야 할 일만을 하기로 했다

 

노동과 목욕, 가끔 설겆이, 우는 애 얼르기,

좋은 책 쓰기, 쓰레기 적게 만들기, 사는 속도 줄이기, 작은 적선,

지금 나는 유산상속을 받은 듯 장래가 넉넉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작아져도 괜찮다

여름 황혼 하루살이보다 더 작아져도 괜찮다

그리되면 그 작은 에너지로도

언젠가 우주의 중심에 가 닿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면우 시인

1951년 대전에서 출생. 보일러공으로 생업.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한남대 문창과 대학원 졸업. 1991년 첫 시집 《저 석양》을 펴내면서 등단.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십일월을 만지다』. 2002년 시 〈거미〉로 제2회 노작문학상 수상. 호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