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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태관 시인 / 포구나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4.
이태관 시인 / 포구나무

이태관 시인 / 포구나무

- 팽나무

 

바람이 일자

나뭇잎에 숨었던 상념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덩달아 가지 위 새들이 날아오른다.

배는 보이지 않고

밧줄에 옥죄었던

상처들만이 온몸에 가득하다

담배 연기 풀어놓으며

나무 그늘로 스미는 사내

남새밭으로 변해버린 주막집 사이로

바람이 불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젓가락 장단에 흔들리던 어깨춤사위다

바다를 떠난 몸들은 저마다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물고기든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 다만,

죽었나 살아 있나의 차이일 뿐

결국 휘돌아 바다에 이른다

물에서도 팽을 당하는 것이다

바람이 일자

나뭇잎에 숨었던 기억들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제, 떠나보내야 할 시간

밧줄에 옥죄었던 기억만이 남아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 에서

 

 


 

 

이태관 시인 / 호박풀떼

​​

낡아가는 것과 삭아가는 것

천년의 사랑도 순간에 지나네

해가 짧아질수록 네게 가는 길이 마냥

섭섭하지는 않겠다

낡은 몸들이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양파를 들이고 감자를 캐고 오이와 가지를 지나

참깨는 털어도 털어도 언제나 부족했다

자라나는 호박잎이 담장을 덮고

그 잎 헤치며 어머니는 예쁜 애호박을 찾았다

가을이 오기 전에 꼭꼭 숨어라

술래에게 이긴 아이가

늙은 호박이 된다

담장에 기대 천천히 낡아가다가

눈 내리는 오후가 멈칫, 힘에 겨울 때

몸을 풀어 천천히 삭아가는 맛

아내는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시집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 (현대시, 2023)

 

 


 

이태관 시인

1964년 대전에서 출생. 1990년 《대전일보》신춘문예 당선.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저리도 붉은 기억』 『사이에서 서성이다』 『나라는 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