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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려시 시인 / 미필적 호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2. 4.
황려시 시인 / 미필적 호명

황려시 시인 / 미필적 호명

 

 

해 지는 쪽으로 오라 거기 끝에는 네가 있고 널 만나기 위해 네가 와야 한다 너의 오른 손등을 감쌀 왼손은 비워 두었다

 

 해 지는 쪽으로 오라 바스러진 이파리들은 모두 바람의 것 빼곡히 눌러놓은 문장이 일어서고 풀이 되는 너의 언덕으로 나는 돌아눕지 않았다 네가 도착하는 시간은 아직 어둡지 않아

 

살아지지 않는 날에

사라지지 않는 날에

 

 


 

 

황려시 시인 / 견고한 우리

 

 

 우리라는 말을 구해 준 우리, 맞지? 우리였지 나를 캐내려고 손톱이 다 해지고야 알았지 파양이 안 되는 질기디질긴 줄기였다는 걸 우리 사이에 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고구마 줄기처럼 껍질을 벗겨야 꺾을 수 있는 내 껍질은 고스란히 고집이라서 손톱이 까맣도록 벗겨야 우리에게 닿을 수 있다는 걸

 

 실 좀 꿰어 봐라 바늘 내미는 엄마에게 긴 실을 귀에 걸어 주면 얼마나 시집을 멀리 가려고 핀잔하더니 엄마는 정말 멀리 가 버리고 난 그래 봐야 평택에서 서울인데 질긴 껍질로 우리에게 아직 닿지 못했는데

 

 우리를 구해 준 우리, 맞지 우리였지

 

 아버님 하나 엄마 하나 우린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지 제 나이보다 빠르게 출가한 언니에게 도망가냐고 물었지 사랑이라고 쉽게 대답했어 비가 오고 있었다

 

 미처 덮지 못한 장독 뚜껑이 우릴 기다렸어 달그락달그락 기다렸어 비는 자꾸 내리고 쌩쌩한 우리끼리 젖은 골목을 키웠어 해묵은 간장이 빗물에 넘치고 있었어

 

 


 

황려시 시인

2015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본명 황영자), 시집 『사랑 참 몹쓸 짓이야』 『머랭』 『기분을 다 써버린 주머니』. 디카시집 『여백의 시』. 약사. 제12회 시와세계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