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병곡 시인 / 리어카 할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3. 2.
이병곡 시인 / 리어카 할매

이병곡 시인 / 리어카 할매

 

 

강변 솔밭에서 음료를 파는

자그마한 할매는

가파른 둑길에

리어카를 끌고 내려가는 것이

하루 장사 중 가장 큰일이다

 

리어카가 길 위에 도착하는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은 운이 좋든 나쁘든

힘들게 리어카를 끌어 준다

할매는 그때마다

내가 저 새끼를 먹여 살려야 되는데 하고 말하는데

쳐다보면 자그마한 개 두 마리가 따라온다

 

내 마음이 편치 못할 때는

아침 산책 한답시고 둑길 주변을 맴도는데

그런 날은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리어카를 가로챈다

보속*한 번 하겠다고 찾아갔는데

할매는 그런 게 무슨 보속이야 하면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리 신부님보다 더 세서

할매 집에서부터 리어카를 끌어야 겠다

 

*보속(補贖) : 자기가 지은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고 난 후 벌을 갚는 행위

 

 


 

 

이병곡 시인 / 아버지 가방이 없어졌다

 

 

 사랑방 한구석에 불안하게 놓여있던 가방이 없어졌다. 낡고 칙칙하고 어두운 바깥같이 그 속도 캄캄한 역사의 기록인 줄 몰랐다. 무슨 커다란 비밀이 들어 있을 것 같아 열댓 살 땐가 몰래 열어보고는 실망하고 말았다. 족보나 재산문서나 중한 서류뭉치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석탄냄새가 밴 낡은 옷을 입은 사진 한 장과 일제 신분증, 제국동전과 우표 등이 죄인처럼 엎드려 있었다.

 

 문서보관소에서 나라 잃은 젊은이들이 조기 묶음같이 엮어진 징용명부 속에 아버지의 이름을 어렵게 찾아냈다. 비로소 가방의 의미를 알았으나 늦었다. 구마모토 탄광에서 아버지가, 가고시마 진지에서 작은 아버지가, 제철소와 조선소와 태평양 낯선 전장에 끌려간 젊은이들이 안고 온 가방이 없어 졌다. 가방을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은 조국과 한 번도 아버지의 슬픈 이력을 물어 보지 않은 아들을 두고 가방들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없어졌다.

 

 


 

이병곡 시인

1955년 경남 밀양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계간 《시평》 신인상을 통해 등단. 밀양시청 도시과장으로 40여 년의 공직생활. 시집 <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망새>. 현재 밀양문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