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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서 시인 / 흔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3. 2.
고영서 시인 / 흔적

고영서 시인 / 흔적

 

 

그때, 나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디

탕, 탕, 탕, 난데없이

오그라든 몸이 냅다

YMCA 뒷골목으로 뛰었는디

전일빌딩 쪽으로

헬리꼽따가 날아갔당께

고도 믿기지 않는디

아무헌티도 말 안 했제,

못 했제

잊어뿔자 잘못 본 것이여

잘못 들은 것이랑께 저 소리!

총알이 정수리를 향하던 꿈을

자주 꿨어라우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는디

헛것 같은 세월이

시방……37년이락 했소?

 

-『경향신문/詩想과 세상』 2024.05.19.

 

 


 

 

고영서 시인 / 홍천강 다슬기

 

 

 나는 목격자입니다

 

 돌바닥에 붙어 밤을 기다리다가 날 밝으면 하루 더 연명하려 했을 뿐 밤보다 더 검은 음모는 몰랐습니다 내가 바닥 생활을 하다가 목격자가 된 것에 대해 제발 입을 다물어 주시길 바랍니다 돈 욕심에 눈먼 남자의 욕망이 아내를 죽이는 것을 목격했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조르고 물에 빠뜨리고 죽이고 그녀의 사망 보험금을 자기 친딸에게 준 것도 나는 몰랐습니다 그날 밤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된다면 나를 모른 척해주세요 그날 밤 내가 얼마나 간절히 하늘과 강을 바꾸고 싶었을지 짐작이 된다면 나를 모른 척해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의붓아빠에 의해 엄마가 죽었음을 알려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눈도 없이, 발도, 입도 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딸 꿈에 나타나 엄마가 떠밀려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딸은 바닥을 기는 나보다 똑똑하고 영리했으니까요

 

 나는 죄가 없습니다

 

 


 

고영서 시인

1969년 전남 장성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기린 울음』 『우는 화살』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 출간. 현재 광주전남작가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