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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고명자 시인 / 술병들의 묘지 외 1편 고명자 시인 / 술병들의 묘지 기억을 떠올리려는 망자의 입술들이야 평생 어두운 쪽으로 기울던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바라만 봐도 취기가 올라 내 등에 업혀 이발소를 간 마지막 아버지 머리를 깎고 면도를 했지 칼도 먹히지 않는 늙은 낯가죽이라고 아가씨는 면상을 찌푸렸어 여기 와서.. 2019. 8. 7.
마종기 시인 / 바람의 말 외 1편 마종기 시인 /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 2019. 8. 7.
황동규 시인 / 지붕에 오르기 외 1편 황동규 시인 / 지붕에 오르기 나이 들며 신경이 멀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 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출근하려고 구두를 신을 때 목수들이 신나게 초인종을 누른다. 버스 정류장 옆에 그 소년이 없다. 목발 짚고 일간스포츠 곁에 붙어 서 .. 2019. 8. 7.
박라연 시인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외 1편 박라연 시인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 2019. 8. 7.
이선 시인 / Me too, 이선 시인 / Me too, G.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설교하는 동안 꽃의 믿음이 왜곡될 리 없지만, 빨강이 삭제된 꽃받침들. 나는 찔레꽃 문답법에 밑줄을 그으며, 그믐달 그림자를 논하는 것은 진부한 독백이라며 당신을 차단한다. 저 장미 꽃말 5페이지 왼쪽 휘어진 줄기 어디쯤에,.. 2019. 8. 7.
김정수 시인 / 양지사우나 김정수 시인 / 양지사우나 사막을 통째 뒤집어 사막으로 들어갔다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건 시간이나 둥근 나무의 건망이 아닌 모래의 지루한 순응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방에서 투명한 방으로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월을 쌓고 또 쌓는 일 툭하면 그만.. 2019. 8. 7.
권성훈 시인 / 짝짝이 그림 권성훈 시인 / 짝짝이 그림 화가인 그녀는 젓가락을 그렸다. 소아마비로 불구가 되었다는 그림 바깥 비틀어진 짝짝이 다리를 하고 한 쪽은 길고 한 쪽은 짧은 젓가락 한 짝이 있는 힘을 모아 화폭을 짚고 있다. 수 없이 짓눌렸을 법한 한 쪽 생애보다 긴 것이 짧은 것에, 짧은 것이 긴 것에 .. 2019. 8. 7.
김백겸 시인 / 은퇴백수 김백겸 시인 / 은퇴백수 우편물을 가지러 퇴직 연구소에 가지. 40년 출근한 연구소는 지난날의 모든 출입기록들이 부식과 때로 적혀있는 콘크리트 양피지. 후배직원들은 유령을 쳐다보듯 잠깐 목례하고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하지. 아직도 자리가 비어있는 별실의 내 책상에서 배달잡지와.. 2019. 8. 7.
서안나 시인 / 나무의 성분 외 1편 서안나 시인 / 나무의 성분 나무는 가죽 가방처럼 자주 죽는다. 초록색은 질이 나쁘고 잘 부러진다. 소파에 나무를 심으면 엘리베이터에서 꽃이 핀다. 나무는 소파부터 엘리베이터까지다. 초록은 고통의 높이 나무는 대승적이라 나이테가 둥글다. 초록의 영혼은 나에게 와서 완성된다. 나.. 2019. 8. 7.
강정 시인 / 키스 외 1편 강정 시인 / 키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 2019. 8. 6.
박홍점 시인 / 치자꽃향기 외 1편 박홍점 시인 / 치자꽃향기 작년 여름에는 아기 주먹만한 꽃 툭툭 불거져 집안을 채우던 향기 연초에 투가리 같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하루하루를 치자나무에 걸어두는 노인 살뜰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요한 눈길 뿌리치지 못했는지 천길 달려와 해거리 하려다 그만두고 딱 한 송.. 2019. 8. 6.
함순례 시인 / 인(印) 외 1편 함순례 시인 / 인(印) 달맞이 고개 넘어 바다로 가는 길 도로변에서 ‘한국시’를 보았다 간판이다 그 끝엔 ‘한국시인’ 좀 작으나 핏빛 노을 같은 붉은 낙관까지 찍어 놓았다 나른하게 고여 있던 자동차 안 일순 술렁거린다 위대한 한국시인이 살고 있는 집? 봄 들판이 휙휙 지나간다 ‘.. 2019.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