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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이성부 시인 / 봄 이성부 시인 /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 2019. 8. 5.
박서영 시인 / 구두 박서영 시인 / 구두 모르는 사내와 우연히 마주 앉았습니다. 탁자에 물컵을 놓고 사라지는 그녀의 구두 굽은 푸른색이었어요. 때때로 나비는 자신이 신고 온 구두의 뾰족한 끝으로 물맛을 느끼기도 하지요. 입술을 통해서 사랑이 나갔지만, 화력발전소는 자주 불을 꺼트린다는 걸 알기에 .. 2019. 8. 5.
최연수 시인 / 태어나는 화요일 최연수 시인 / 태어나는 화요일 우연히 듣는 안부에 흔들리는 소리 밖으로 요일들이 빠져나온다. 흐려진 난시를 비빈 눈동자가 빨갛게 자라도 한곳으로 달려가는 길을 따라가면 오래 머무는 골목이 따로 있다. 혀를 굴리는 이름은 이미 하구로 흘러간 번지 새로운 주소지가 생겨도 아직 .. 2019. 8. 5.
임희선 시인 / 환상박피 임희선 시인 / 환상박피 식순(式順) : -나는 기념식수였다 국민의례 아버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고 어머니는 애국가를 불렀다. 동맥을 타고 애국심이 온몸에 뿌리 내려 나는 부모에게도 기꺼이 총을 겨눴다. 나라를 명분으로 덩굴손 키우고 가시 키우고 당당한 거목으로 자랐다. 경과.. 2019. 8. 5.
석연경 시인 / 씨앗의 배후 석연경 시인 / 씨앗의 배후 투명한 묵직한 집이네요 구름이네요 절기없는 바다 곁방도 나무도 깊은화병도 가벼운 둥둥 덩어리 떠다닙디다 젤라틴이 된 구름의 뼈가 점묘법으로 씨앗을 뱉어냅니다. 수풀이 없는 말간 공중 정원이네요. 늑골에서 구름이 흘러나옵니다. 열쇠 없는 악기가 눈.. 2019. 8. 5.
박철 시인 /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외 1편 박철 시인 /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 2019. 8. 4.
허연 시인 / 칠월 외 1편 허연 시인 /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 2019. 8. 4.
이우림 시인 / 섬 외 1편 이우림 시인 / 섬 그 섬엔 아직도 묻어 둔 내가 있다 만석동 나루터 석양을 깨문 겨울바다가 울컥한다 선착장으로 기어오르는 파도의 너울이 허벅지를 파고든다 통통배에 먼저 떠내려간 나의 어둠 어둠은 바다를 먹고 바다는 통통배를 먹는다 섬 속의 섬 분교의 빈 교실에서 풍금소리가 .. 2019. 8. 4.
김희정 시인 / 무안(務安) 외 1편 김희정 시인 / 무안(務安) 아버지는 나에게 무안(務安)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내가 본 무안은 그늘진 생(生)들이 뒤엉켜 발버둥 치는 모습뿐이었다 한여름 베짱이처럼 사는 사내들, 그 여름 이글거리는 그림자 피하지 못한 개미 같은 여자들, 새끼들 노동까지 올려놓아야 밥술을 뜨게.. 2019. 8. 4.
김유자 시인 / 고백하는 몸들 외 1편 김유자 시인 / 고백하는 몸들 12월 기침을 할 때마다 오빠가 튀어나온다 폐렴을 앓다 죽었다는 한 살의 오빠는 이름이 있었을까 몇 번이나 불렸을까 9월 “얘야 이젠 정말 죽고 싶구나” 아흔여섯 할아버지 말에 내 입술이 잠긴다 할아버지 입이 더는 밥 앞에서 열리지 않는다 5월 연등을 .. 2019. 8. 4.
김송포 시인 / 곡절 김송포 시인 / 곡절 반달이 나무를 안고 슬픔에 차 있다. 굽어보니 내 얼굴이고 멀어 져 가는 당신 얼굴이다. 내가 아닌 당신이 저수지에비친다. 달의 뿌리가 반만 물에 담가져 있다. 백만 년 동안 나무의 등만 바라보듯 곡선처럼 휘어져 다시 돌아오기를 꿈꾼다.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배.. 2019. 8. 4.
최문자 시인 / 잎 최문자 시인 / 잎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것 단 한 번도 내가 없는 것 새파란 건 새파랗게 울고 싶다는 뜻 뒤집혀도 슬픔은 똑같은 색깔이 된다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건 많이 어둡고 많이 중얼거리고 많이 울먹이다 비쩍 마르고 많이 죽고 죽어서도 가을이 그렇듯 몇 개의 마지막을 재로 .. 2019.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