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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이명 시인 / 등공(騰空) 이명 시인 / 등공(騰空) 70마일 도로에서 정신없이 100마일로 달린 적 있다. 말을 타고 달리다 돌아보며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는 인디언처럼. 해변에서 따라오지 못한 내 영혼을 기다린 적 있다. 내 청춘이 다하지 않은 날이었다. 내 영혼이 몸을 떠나 우주로 달릴 때가 있다. 설.. 2019. 8. 4.
고경자 시인 / 가을의 힘 고경자 시인 / 가을의 힘 모든 것들이 정상이었다. 너를 거기에 남겨두고 온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다시 만나러 갈 용기도 없으니 비행기로 치면 안전궤도에 진입했는데 자꾸 돌아보게 하는 이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당기는 힘, 우연히 만난 행성 하나를 몇 광년 거리에서 오래 .. 2019. 8. 4.
한영수 시인 / 언니의 사랑 한영수 시인 / 언니의 사랑 조금 더 어려운 장소다. 구월도 오후 세시 매미가 울고 있다. 직벽이 선다. 붉고 푸른 회오리 언니의 사랑은 이런 거다. 손톱 하나 집어넣을 틈이 없는 매미 울음 곁에 두 발을 두고 언니의 계절을 두른다. 구름이 피어난다. 동남풍 아니어도 희고 아득한 높이 약.. 2019. 8. 4.
장정자 시인 / 일생 외 1편 장정자 시인 / 일생 꽃피우면서 늙는 나무가 있다 꽃피면서 죽는 나무가 있다 업고 뛰던 메뚜기는 잡혀서도 업고 있다 짝짓기 끝낸 수컷을 암놈 사마귀가 아작아작 먹고 있다 부채질하다 알이 깨어나자 탈진해 죽은 수컷 얼룩동사리 큰가시고기 둥지 지어 천 개의 알을 낱낱이 흔들어주.. 2019. 8. 3.
심보선 시인 / 인중을 긁적거리며 외 1편 심보선 시인 / 인중을 긁적거리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 2019. 8. 3.
김광규 시인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외 1편 김광규 시인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 2019. 8. 3.
김재혁 시인 / 딴생각 외 1편 김재혁 시인 / 딴생각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한 발짝 떼어놓을까. 가만있을까. 다 그만둬. 딴생각이 펼쳐놓은 마당가 바지랑대에 잠자리가 앉았습니다. 잠자리의 눈이 닿는 곳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사는 일은 역시 팍팍합니다. 저만치 옛사랑이 흘러갑니다. 옛사랑은 비안개에 젖.. 2019. 8. 3.
홍재운 시인 / 블러그들 외 1편 홍재운 시인 / 블러그들 숫자 5는 아크릴 화 같은 집이다 언제든 다시 지을 수 있는 젯소바닥, 젯소기둥, 젯소심장이 있다 숫자 5는 두 번째 갈비뼈 사이에 에녹서와 보르헤스를 겹쳐놓았다 별들의 강물 속을 유영하는 숫자 5는 기포처럼 떠다니는 아바타들의 블루마운틴이다 아바타들이 .. 2019. 8. 3.
김은숙 시인 /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외 1편 김은숙 시인 /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 2019. 8. 3.
안차애 시인 / 먼지經 외 1편 안차애 시인 / 먼지經 ㅡ먼지가 없으면 ㅡ푸른 하늘도 없고 ㅡ연잎 위로 구르는 물방울의 표면장력도 없으리 TV화면 속은 온통 진폐의 꽃밭이다 미세혈관에서 우주 속까지 닿는 허공마다 온통 먼지의 춤이다 벽과 선을 지워 소울 풀한 웨이브다 기억과 추억을 헐어 만든 리듬의 풍경이다 .. 2019. 8. 3.
이정란 시인 / 尺 이정란 시인 / 尺 다리를 尺 걸치고 어디다 발길질이니 긴 회랑을 다 못 지나고 햇빛이 쓰러졌다 회랑 바닥에 흩어진 햇빛의 옷깃이 하얀 먼지처럼 펄럭인다 바다에 빚졌으니 모두 바다를 잊어선 안 돼 회랑 바깥 멀리에선 파도가 몰아쳤다 해변엔 퉁퉁 불은 보름달이 기력을 잃어가고 있.. 2019. 8. 3.
김명이 시인 / 고양이 이데아 김명이 시인 / 고양이 이데아 오를수록 낮아지는 계단에서 스프링을 튕기던 나날들. 엘리베이터에서 초고속을 바라보며 풍경은 경품처럼 바뀐다. 혼몽하게 겹친 노을빛 그라데이션. 고무줄과 파이의 비례는 현기증인 것 같아 긴 오후의 손톱이 노랗게 익고 저 끝 지평선을 직시한다. 눈.. 2019.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