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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안나 시인 / 프라하, 스타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2.

서안나 시인 / 프라하, 스타일

 

 

잠시 나를 떠날게요, 프라하

프라하 스타일로, 프라하

불타는 성당과 여행용 흰 손을 들고, 프라하.

 

여행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기술.

내 눈동자 안의 침묵의 계단을 오르는 것.

혼자 밥을 먹으며 바다를 열어보는 것.

 

국경을 넘을 때면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조금씩 녹습니다.

이민자의 표정이 됩니다.

여행자의 수첩에는 국경의 수칙과

가난한 아이들의 허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라하, 불탄 성당 주변을 걸었습니다.

여행객과 여행객이 부딪쳐 국경이 탄생합니다.

오후 4시 30분.

성당 종탑을 깨고 불타는 말을 달려 나오는

중세의 녹슨 기사들

불탄 성당이 나를 뚫고 지나갑니다.

 

불에 탄 영혼과

낮은 저녁과 사소한 용기들검은 눈과 검은 손바닥으로 올리는

프라하의 불타는 젖은 기도.

고백은 삐걱거리는 금속성에 가깝습니다.

 

기도란 나의 흰 뼈를 뽑아

나와 당신의 피의 국경을 허무는 일

프라하에서 프라하를 버립니다.

 

엽서를 씁니다. 프라하는 이별하기 좋은 성분

구름을 고독으로 번역합니다.

모든 것들은 먼지에서 왔으니

나는 무엇인가 되지 않으려 합니다.

까맣게 탄 두 발로

가고 싶은 곳까지 가볼 겁니다.

 

여행자는 이국적으로 밤을 발견합니다.

 

계간 『시인시대』 2018년 가을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첫사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고 있으면 따뜻해진다.

누군가 흐린 발소리로 나를 다녀간다.

 

불의 검은 뼈를 뽑아

나의 영혼을 꺾어 버렸다.

심야버스가 지나간다.

상처 같은 게 나 있다.

 

뒤돌아보면

처음이란

언제나 캄캄하다.

 

꽃이 피면 나는 꽃을 보내지 않겠다.

이것은 결심에 가깝다.

 

단순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반년간 『서정과 현실』 2018년 하반기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첫사랑

 

 

꽃잎을 따면

죽은 사람 냄새가 난다.

 

내 두 손에

흰 피가 묻는다.

밤이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내 손을

당신의 밤으로 던졌다.

잃어버린 손을 흔드는 건 세기말적이다.

 

내가 뱉은 뜨거운 사막과

독 이 오른 전갈들

검은 이마는

사랑의 불길을 통과한 자의 증거.

 

사랑은 뜨거운 불의 문법.

수첩을 펴면

누군가 흰 손으로 태양을 떨어뜨린다.

 

반년간 『서정과 현실』 2018년 하반기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진흙 연습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의 영혼과도

마주치지 않으며

 

내 안에

진흙 뼈와 진흙 감정이

고여 있지 않으며

 

진흙은 사람을 쉽게 버리며

진흙은 찰지고 고요하고

아름답지 않으며

 

비를 맞으면 젖지 않으며

내 몸에서

무너진 풍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으며

 

나는 진흙 입술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로 노래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은 배반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은 뒤돌아서는 인간을 만들지 않으며

 

진흙의 두 손을 버리지 않았으며

진흙 피가 쏟아지지 않았으며

진흙 심장이 금이 가지 않았으며

내 눈에서 짐승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며

 

진흙 입술은

칼로 손목을 그은 자처럼

두 팔의 영혼이 되지 않으며

 

사막이 지나가지 않고

불타는 밤이 만져지지 않고

진흙이 진흙을 끌고 오지 않고

 

다 읽을 수 없는

진흙 얼굴은

 

계간 『동서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우연히 주운 저녁

 

 

누군가 버린 저녁을

우연히 주웠다.

우연이라는 말에는 물기가 묻어있다.

젖은 눈동자가 있었다.

나와 마주쳤다.

 

밤은 투명하고

밤은 기울고

밤은 취하고

밤은 오지 않고

밤은 멀리 떠나고

 

아 이 우 에 오

아 이 우 에 오

발음하면

모음에서 진흙 맛이 났다.

 

가장 높이 피는 꽃은

제 몸속에서 피는 꽃.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손을 씻으면

얼굴이 되었다.

저녁이 견딜 만 했다.

 

계간 『동서문학』 2018년 가을호  발표

 

 


 

서안나(徐安那)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겨울호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가 있음. 현재  <서쪽> 동인이며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