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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양주동 시인 / 이리와 같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4.

양주동 시인 / 이리와 같이

 

 

조선아, 잠들었는가, 잠이어든

숲속의 이리와 같이 숨결만은 우렁차거라.

 

비바람 몰아치는 저녁에

이리는 잠을 깨어 울부짖는다,

그 소리 몹시나 우렁차고 위대(偉大)하매

반(半)밤에 듣는 이 가슴을 서늘케 한다.

조선아, 너도 이리와 같이 잠깨어 울부짖거라.

 

아아 그러나 비바람 몰아오는 이 `세기(世紀)'의 밤에

조선아, 너는 잠귀 무딘 이리가 아니냐.

그렇다, 너는 번개 한 번 번쩍이는 때라야,

우뢰 소리 하늘을 두 갈래로 찢는 때라야

비로소 성나 날뛰며 울부짖을 이리가 아니냐.

 

조선아, 꿈을 깨어라, 꿈이어든

산비탈 이리와 같이 꿈자리만은 위트롭거라.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인간송가(人間頌歌)

 

 

가장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그의 이마 위에 입술을 바칠 때,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때,

남의 불행을 위하여 한 방울의 눈물이나마 정성껏 바칠 때,

길이 잠들기 전 안식의 기도를 검님께 바칠 때,

보라, 우리의 `삶'이 또한 거룩치 않으뇨.

 

죄악 많고 불행 많은 사람의 세상에

오히려 이렇듯 정성스러운 `순간'이 있나니.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 시인 / 잡조(雜調) 오장(五章)

 

 

1

 

비오는 밤

자리위에 누워서 생각나는 것―

해질녘 길가에 서서

울고 있던 어린아이는

그 뒤에 어머니나 찾아갔을까,

뉘집의 어린아인지……

 

2

 

"기어코 떠나갔어요,

멀리 북만주로 떠나갔어요.

가난의 살림은 차마 할 수 없다고

어젯밤 잠든 새 기어이 떠나갔어요."

날조차 흐리터분한 봄날 아침에,

행랑어멈의 하소연하는 말, 말하는 얼굴.

 

3

 

사람의 얼굴을 보기 싫은 날,

밉던 사람조차 한없이 그리워지는 날.

 

4

 

이삼월의

남은 추위가 아직도 다 가기 전에

성 밖에는 거지의 움막이

하나씩 둘씩 늘어만 간다.

옆으로 지나는 사람 웃고 하는 말―

"여름에는 저렇게 한데서 잠자는 편이

집안에서 자는 것보다 시원하렷다."

 

5

 

"세상이 이제는 말세인가 봐."

신문의 사회면(社會面) 보고

강개롭게 탄식하는 늙은이의 말.

"새로운 세계는 돌진(突進)합니다."

곁에 앉은 젊은이 대꾸하는 말.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 1932

 

 


 

양주동(梁柱東) 시인 / 1903∼1977

호:무애(無涯). 시인.국문학자.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 1923년에 유엽. 백만 등과 함께 시 동인지 <금성>을 발간, 창간호에 시 [기몽(記夢)] [영원한 비밀]을 발표.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 평양 숭실 전문 학교 교수, 1929년에는 <문예공론>을 발간. 1940~1945년에 경신 중학교 교사, 1947년에는 동국 대학교 교수로 취임, 이후 서울대, 경희대, 숙명 여대 등에 출강하여 국문학 고전과 영문학을 강의. 이어 1954년에 학술원 종신 회원, 그 후 연세대 교수, 동국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 학술원상을 수상하고 문화 훈장,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으며, 신라 향가 등을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크게 기여. 저서에는 <조선 고가 연구><여우 전주><국어 연구 논고><국문학 고전 독본>등과 시집<조선의 맥박>,수필집<문주 반생기><인생잡기>, 역서 <에리엇 전집><영시 백선><세계 기문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