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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재삼 시인 / 바람의 내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3.

박재삼 시인 / 바람의 내력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박재삼 시인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 다 그런 일이라!

 

 


 

 

박재삼 시인 / 사랑의 노래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박재삼 시인 / 사랑하는 사람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박재삼 시인 / 슬픔을 탈바꿈하는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박재삼[朴在森, 1933. 4.10 ~ 1997. 6.8] 시인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중퇴. 1955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정적〉(서정주 추천), 〈섭리〉(유치환 추천)가 발표되어 등단.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2천년의 바람』, 『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사랑이여』,  『해와 달의 궤적』 『은 푸른 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다시 그리움으로』가 있음. 그외 시선집과 수필집이 다수 출간. 이후 현대문학 시인상, 문교부 주관 문예상, 제9회 한국시협상, 제7회 노산문학상,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 15권의 창작시집과 8권의 수필집을 펴냄. 1997년 6월 8일 10여 년의 투명생활 끝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