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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재삼 시인 / 12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1.

박재삼 시인 / 12월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박재삼 시인 /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시인 /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박재삼 시인 / 나는 아직도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 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박재삼 시인 / 나무 그늘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 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박재삼[朴在森, 1933. 4.10 ~ 1997. 6.8] 시인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중퇴. 1955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정적〉(서정주 추천), 〈섭리〉(유치환 추천)가 발표되어 등단.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2천년의 바람』, 『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사랑이여』,  『해와 달의 궤적』 『은 푸른 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다시 그리움으로』가 있음. 그외 시선집과 수필집이 다수 출간. 이후 현대문학 시인상, 문교부 주관 문예상, 제9회 한국시협상, 제7회 노산문학상,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 15권의 창작시집과 8권의 수필집을 펴냄. 1997년 6월 8일 10여 년의 투명생활 끝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