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 /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네 집은 십리 너머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건만 혼자만 끙끙 그리울 때가 더 많았다네.
말 못하는 저 무성한 잎새들을 보면 항시 햇빛에 살랑살랑 몸채 빛나며 흔들리고 있건만. 말을 할 줄 아는 心中에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大明天地에 이 캄캄한 구석을 내보이기가 민망하던 아, 서러운 그때여.
박재삼 시인 / 낙과소리를 들으며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박재삼 시인 / 라일락꽃을 보면서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박재삼 시인 / 무언(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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