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박재삼 시인 /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2.

박재삼 시인 / 나뭇잎만도 못한 짝사랑

 

 

네 집은 십리 너머

그렇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건만

혼자만 끙끙

그리울 때가 더 많았다네.

 

말 못하는 저 무성한

잎새들을 보면

항시 햇빛에 살랑살랑

몸채 빛나며 흔들리고 있건만.

말을 할 줄 아는 心中에도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으니

大明天地에

이 캄캄한 구석을

내보이기가 민망하던

아, 서러운 그때여.

 

 


 

 

박재삼 시인 / 낙과소리를 들으며

 

 

짧은 가을 석양에는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다른 때에 비하여

어찌 그리 쓸쓸한가

 

아침이나 한낮에는

다 익으면

햇빛과 바람과 수분을

아름답게 겉으로 내뿜으며

하늘 속에 있는 전수명을 다하고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겨

마지막을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때는 덜 느끼는 것이지만,

그렇게 적막강산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주위가 해지기 얼마 전에는

그럴 수 없이 몸에 스미는

아, 짜릿하고

어딘지 모르게 울고 싶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 멸망의 몸짓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아직도 알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벌써 오십 고개를 몇 해 넘겼네.

 

 


 

 

박재삼 시인 / 라일락꽃을 보면서

 

 

우리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을 같이한 것이

이 이상 고마울 것이 없고

미구(未久)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로 잠시

한자리 머무는 것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세상 일은 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은 것이네.

 

 


 

 

박재삼 시인 / 무언(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千)날 만(萬)날 가야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박재삼[朴在森, 1933. 4.10 ~ 1997. 6.8] 시인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중퇴. 1955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정적〉(서정주 추천), 〈섭리〉(유치환 추천)가 발표되어 등단.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2천년의 바람』, 『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사랑이여』,  『해와 달의 궤적』 『은 푸른 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다시 그리움으로』가 있음. 그외 시선집과 수필집이 다수 출간. 이후 현대문학 시인상, 문교부 주관 문예상, 제9회 한국시협상, 제7회 노산문학상,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 15권의 창작시집과 8권의 수필집을 펴냄. 1997년 6월 8일 10여 년의 투명생활 끝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