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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4.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박재삼 시인 / 신록(新綠)을 보며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의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一時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 오누나.

 

또한 이를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微風

가볍고 연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박재삼 시인 / 아름다운 사람

 

 

바람이 부는 날은

별들이 갈대로 쓸리고 있었다.

강가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는

아름다운 사람아.

 

달이 높이 뜬 날은

별들은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얼어붙은 강을 보며 고개 숙인

아름다운 사람아.

 

 


 

 

박재삼 시인 /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시인 / 일월 속에서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박재삼[朴在森, 1933. 4.10 ~ 1997. 6.8] 시인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중퇴. 1955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정적〉(서정주 추천), 〈섭리〉(유치환 추천)가 발표되어 등단.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2천년의 바람』, 『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사랑이여』,  『해와 달의 궤적』 『은 푸른 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다시 그리움으로』가 있음. 그외 시선집과 수필집이 다수 출간. 이후 현대문학 시인상, 문교부 주관 문예상, 제9회 한국시협상, 제7회 노산문학상,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 15권의 창작시집과 8권의 수필집을 펴냄. 1997년 6월 8일 10여 년의 투명생활 끝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