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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재삼 시인 / 천년의 바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5.

박재삼 시인 /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시인 / 첫사랑 그 사람은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 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박재삼 시인 / 햇빛의 선물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박재삼 시인 / 혹서일기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박재삼[朴在森, 1933. 4.10 ~ 1997. 6.8] 시인

1933년 4월 10일 일본 동경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중퇴. 1955년 《현대문학》 추천을 통해〈정적〉(서정주 추천), 〈섭리〉(유치환 추천)가 발표되어 등단.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2천년의 바람』, 『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사랑이여』,  『해와 달의 궤적』 『은 푸른 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다시 그리움으로』가 있음. 그외 시선집과 수필집이 다수 출간. 이후 현대문학 시인상, 문교부 주관 문예상, 제9회 한국시협상, 제7회 노산문학상,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 15권의 창작시집과 8권의 수필집을 펴냄. 1997년 6월 8일 10여 년의 투명생활 끝에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