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 / 바람의 내력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박재삼 시인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 다 그런 일이라!
박재삼 시인 / 사랑의 노래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랑이 너머에 있고 산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박재삼 시인 / 사랑하는 사람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박재삼 시인 / 슬픔을 탈바꿈하는
아무리 서러워도 불타는 저녁놀에만 미치게 빠져 헤어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밤의 적막 속에 그것은 깨끗이 묻어버리고 다음날에는 비록 새 슬픔일지라도 우선은 아름다운 해돋이를 맞이하는 심사로 요컨대 슬픔을 탈바꿈하는 너그러운 지혜가 없이는 강물이 오래 흐르고 산이 한자리 버티고 섰는 그 까닭 근처에는 한치도 못 가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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