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 / 12월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박재삼 시인 /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시인 / 그대가 내게 보내는 것
못물은 찰랑찰랑 넘칠 듯하면서 넘치지 않고 햇빛에 무늬를 주다가 별빛 보석도 만들어 낸다.
사랑하는 사람아, 어쩌면 좋아! 네 눈에 눈물 괴어 흐를 듯하면서 흐르지 않고 혼백만 남은 미루나무 잎사귀를, 어지러운 바람을, 못 견디게 내게 보내고 있는데!
박재삼 시인 / 나는 아직도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 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박재삼 시인 / 나무 그늘
당산나무 그늘에 와서 그 동안 기계병으로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을까 몰라. 이 시원한 바람을 버리고 길을 잘못 든 나그네 되어 장돌뱅이처럼 떠돌아 다녔었고, 이 넉넉한 정을 외면하고 어디를 헤매다 이제사 왔는가.
그런 건 다 괜찮단다. 왔으면 그만이란다.
용서도 허락도 소용없는 태평스런 거기로 가서, 몸에 묻은 때를 가시고 세상을 물리쳐보면
뜨거운 뙤약볕 속 내가 온 길이 보인다. 아, 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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