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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아버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1.

박두진 시인 / 아버지

 

 

철죽 꽃이 필 때면,

철죽 꽃이 화안하게 피어 날 때면,

더욱 못견디게

아버지가 생각난다.

 

칠순이 넘으셔도 老松처럼 정정하여,

철죽꽃이 피는 철에 철죽 꽃을 보시려,

아들을 앞세우고

冠岳山,

서슬진 돌 바위를 올라 가셔서,

철죽 나물 캐어다가

뜰 앞에 심으시고

철죽 꽃이 피는 것을 즐기셨기에,

철죽 나물 캐어 드신

흰 수염 아버지가

어제같이 산탈길을 걸어 내려오시기에,

 

철죽 꽃이 피는 때면,

철죽 꽃과 아버지가

한꺼번에 어린다.

 

물에 젖은 둥근 달

달이 솟아오르면,

흰옷을 입으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달 있는 川邊길을

늦게 돌아오노라면

두진이냐 ?

저만치서 커다랗게 불러 주시던

하얗게 입으셨던 어릴 때의 아버지

 

四月은 가신 달,

아아, 철죽 꽃도 흰 달도

솟아 있는데,

손수 캐다 심어 놓신

철죽 꽃은 피는데,

 

어디 가셨나

큰기침을 하시며,

흰옷을 입으시고

어디 가셨나.

 

 


 

 

박두진 시인 / 저 고독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박두진 시인 / 精(정)

 

 

그때 처음 열리던 하늘의 응결된

푸른 정기 처음 숲의 초록 바람

처음 바다 처음 강의 파도 소리 여울 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태양의 금빛 촉감

처음 타오르던 지열

처음 만발한 꽃들의 향기,

처음 울음 울던 맹수들의 포효

처음 지저귀던 새소리 네게서 들린다.

 

그때 처음 헤엄치던 물고기의 비늘무늬

처음 걸리던 하늘의 무지개

처음 밤의 별빛 달빛, 그때

처음 사람들의 입맞춤의 첫대임

첫번째 황홀의 울음 울던 부끄러움

처음 타오르던 노을빛 네게서 어린다.

 

그때 처음 사람들의 첫 낱말

처음의 오해 처음의 노여움

처음 사람의 첫 증오 피흘림

처음 만나는 죽음의 두려움과 서러움

네게서 보인다.

 

너는 지금 나의 창가 오월

바람이 뜰의 그 신록의 잎새 사이 먼

천산 산맥의 청청한 햇살에 젖어

불어와 서성대는 책상에

그러나 의젓이 그러나 잠잠하게 볕살 속에 앉아있다.

 

 


 

 

박두진 시인 / 하늘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