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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새벽바람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0.

박두진 시인 / 새벽바람에

 

 

칼날 선 서릿발 짙 푸른 새벽,

상기도 휘감긴 어둠은 있어,

 

하늘을 보며, 별들을 보며,

내여젓는 내여젓는 백화(白樺)의 손길.

 

저 마다 몸에 지닌 아픈 상처에,

헐덕이는 헐덕이는 산길은 멀어

 

봉우리엘 올라서면 바다가 보히리라.

찬란히 트이는 아침이사 오리라.

 

가시밭 돌사닥 찔리는 길에,

골마다 울어예는 굶주린 짐승

 

서로 잡은 따사한 손이 갈려도,

벗이여! 우린 서로 불르며 가자.

 

서로 갈려올라 가도 봉우린 하나.

피 흘린 자욱마단 꽃이 피리라.

 

 


 

 

박두진 시인 / 서한체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들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

 

 


 

 

박두진 시인 / 소

 

 

푸른 하늘인들 한 줄기 선혈을 안 흘리랴?

의지의 두 뿔이 분노로 치받을 때

 

태산인들 딩굴으며 무너지지 않으랴?

전신이 노도처럼 맞받아 부딪칠 때

 

오늘 한 가락 고삐에 나를 맡겨

어린 소녀의 이끌음에도 순순히 따라 감은

 

불거진 멍에에 山 같은 짐을 끌고

수렁에 철벅거려 종일을 논 갈음은

 

네굽 놓아 내달리는 벌판의 자유

찌르는 뿔의 승리를 모르는 바 아니라

 

오늘은 오오래인 오늘은 다만 참음

언젠가는 다시 벅찰 크낙한 날을 위하여

 

눈 스르르 감고 새김질하는 꿈 한나절

먼 조상 포효하던 산악을 명상하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절렁대는 요령에

대지 먼 외줄기길 千里를 잰다.

 

 


 

 

박두진 시인 / 시인 공화국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며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수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 구 , 구 , 구 ,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이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갈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 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