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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정 시인 / 연꽃이었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0.

신석정 시인 / 연꽃이었다

 

 

그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하나 있다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나절 연잎 위,

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 떨어지듯, 나는

때때로 자맥질하거나

수시로 부서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의 궤도는, 억겁을 돌아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수없이. 수도 없이

 

그저 그런, 내가

그 깊고도 깊은 물 속을

얼만큼 더 바라볼 수 있을런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프다

 

 


 

 

신석정 시인 / 화석이 되고 싶어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멀리 흰 비둘기 그림자 찾고 싶다

 

느린 구름 무엇을 노려보듯 가지 않고

먼 강물은 소리 없이 혼자 가네

 

뽑아 올린 듯 밋밋한 산봉우리 곡선이 또렷하고

명항한 날이라 낮달이 더욱 희고나

 

석양에 빛나는 까마귀 날개같이 검은 바위에

이런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어......

 

 


 

 

신석정 시인 / 봄의 유혹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가벼이 떠가고

가뜬한 남풍이 무엇을 찾어내일 듯이

강 너머 푸른 언덕을 더듬어 갑니다

 

언뜻언뜻 숲새로 먼 못물이 희고

푸른 빛 연기처럼 떠도는 저 들에서는

종달새가 오늘도 푸른 하늘의 먼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시내물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아지랑이 영창 건너 먼 산이 고요합니다

오늘은 왜 이 풍경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애요

 

산새는 오늘 어데서 그들의 소박한 궁전을 생각하며

청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겠읍니까?

나는 지금 산새를 생각하는 '빛나는 외로움'이 있읍니다.

 

임이여 무척 명랑한 봄날이외다

이런 날 당신은 따뜻한 햇볕이 되어

저 푸른 하늘에 고요히 잠들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신석정[辛夕汀, 1907.7.7~1974.7.6] 시인

1907년 전라북도 부안(扶安)에서 출생. 본명은 석정(錫正). 보통학교 졸업후에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佛典) 연구.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詩作활동 시작.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작품활동. 그해에 「선물」,「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힘. 8.15 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 1시집 『촛불』(1939)과,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를 비롯,  계속

해서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 간행.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