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희 시인 / 거인의 망원경
불꽃머리 남자가 종탑에 있다 종일 하늘만 바라보다 거인이 된 남자,
피렌체의 골목은 종탑 아래 있고 하늘은 왜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그려놓는 걸까 질문은 생각에 자유를 가져다준다지 포도주의 기운에 맛좋은 물음이 녹아있듯 골목에서 시작된 그의 걸음이 피렌체를 돌아 이탈리아어로 쓴 하늘이 되었지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도 모른 체, 산꼭대기엔 수도원이 있고 젊은 수도사들은 한 가지 생각으로 야위어 갔네 열중할 그 무언가가 절실한 시간에 연애든 분노든 물음이 아니라 무조건 믿는 건 성급한 일, 24시간마다 한 번씩 도는 하늘의 뚜껑, 누가 여닫는 걸까 그의 발이 누가 누가를 반복하는 사이
피사의 사탑에서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중력이 떨어졌네 몇백 년 후 우주인이 달 표면에서 망치와 깃털을 동시에 떨어뜨렸듯, 그의 망원경 속에서 지구가 점점 둥글어질 때 둥글어지는만큼 커진 남자
비밀의 모퉁이가 줄어들 때마다 거인의 눈은 점점 빛났네
우주와 골목의 거리를 줄여준 망원경, 유리알 속 달은 그에게 속삭였네 듣지말고 보라고 베네치아 종탑처럼 한 사람의 행로가 어떻게 궤도를 가지는지
허리 굽은 남자가 지나간 자리에 부동자세로 서버린 종탑, 그의 잔주름 파랑처럼 침묵하고 있네 진실은 듣고싶어 하는 것을 믿는 것
시력을 잃고 시력을 찾은, 거인이 죽자 사과가 태어났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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