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영 시인 / 가로등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시집 - 뱀 잡는 여자 (2006년 서정시학)
한혜영 시인 / 풀벌레 그리고 생각
풀벌레 톱질 소리 툭툭 끊기는 푸른 신경 어차피, 어차피 하며 목숨을 켜고 있다 내 젊어 헌데를 앓던 꿈과 사랑, 뭐 이런 것들 아직도 못 다 저문 殘光 같은 시절 있어 차라리, 차라리 하며 톱밥을 쌓고 있다 바람은 통나무 같은 어둠을 켜 棺을 짜고
한혜영 시인 / 무너진 시절
기적소릴 내고 싶어 내 몸이 우는 날은 낡은 枕木, 그 추억도 비에 젖고 있을 거다 오래 전 時效를 넘긴 차표 한 장 나뒹굴고
驛舍는 무너지고 이후 나는 갇혀 있고 세월은 녹을 먹은 철마처럼 우는 거다 그리움 온몸에 등불 달고 꽃뱀처럼 달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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