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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혜영 시인 / 가로등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3. 11.

한혜영 시인 / 가로등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시집 - 뱀 잡는 여자 (2006년 서정시학)

 

 


 

 

한혜영 시인 / 풀벌레 그리고 생각

 

 

풀벌레 톱질 소리

툭툭 끊기는 푸른 신경

어차피, 어차피 하며

목숨을 켜고 있다

내 젊어

헌데를 앓던

꿈과 사랑, 뭐 이런 것들

아직도 못 다 저문

殘光 같은 시절 있어

차라리, 차라리 하며

톱밥을 쌓고 있다

바람은

통나무 같은

어둠을 켜 棺을 짜고

 

 


 

 

한혜영 시인 / 무너진 시절

 

 

기적소릴 내고 싶어

내 몸이 우는 날은

낡은 枕木,

그 추억도 비에 젖고 있을 거다

오래 전

時效를 넘긴

차표 한 장 나뒹굴고

 

驛舍는 무너지고

이후 나는 갇혀 있고

세월은

녹을 먹은 철마처럼 우는 거다

그리움

온몸에 등불 달고

꽃뱀처럼 달리는데

 

 


 

한혜영 시인

1953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 1989년 《아동문학연구》 동시조 당선.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8년 《계몽아동문학상》 장편동화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과 시조집 『숲이 되고 강이 되어』 그리고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가 있음. 2006년 미주문학상 수상. 2020년 제5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경희사이버대 수석졸업. 현재 미국 플로리다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