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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사공정숙 시인 / 우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1.

사공정숙 시인 / 우산

 

 

비 오시는 날

우산 하나 넉넉히 펼쳐 들면

우산 속으로 세상이 들어온다.

우산 크기만  한 세상을 오롯이 차지하고

기쁨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하고 사랑이기도 한

아주아주 작은 기억의 입자들이

촉촉이 스며 내리는 우산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우산 위를 두드리는 빗소리

꿈속으로 들어오면

골목길 따라,한길 건너,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도

새의 둥지,원두맏,갖추 세운 짚더미,피어오른 연꽃,

어느 여름 박하향기 풍기는 수풀 길을 거닐던

하오의 햇살과 소나기를 추억한다.

 

비오시는 날,

초록 우산 하나 샀다.

 

-좋은생각 6월호중에서

 

 


 

 

사공정숙 시인 / 나비와 피라미드

 

 

나비 한 마리가 출근길에

처무우밭도 아닌

바다도 아닌

지하철 역사로 팔랑거리며 내려앉았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다시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가만히 멈춘 날갯짓

나비에게 역은 저 너머 얼음 박힌 우주처럼,

끝내 풀지 못할 방정식처럼

차갑고도 큰 세계이다

나비는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꽃밭으로 가려는 것도 아니다

나비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찾아온 것이다

봉인되지 않은 나비의 피라미드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더 단단해진 무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발자국 소리,

전동차의 울림과 궤적을 부장품으로 넣었음이다

부장품이 사라진 역사는

나비의 존재를 우상화하고

저물녘 낡아가는 기울기 속에서

꽃의 지문을 더듬던 혼잣말까지

모두 박제로 만들어간다

여기, 저기 흔들리며 걸어가는 나비의 피라미드

 

 


 

사공정숙 시인

2005년 《문학시대》 시 등단. 1998년  《예술세계》 수필 등단, 저서로는 시집 『푸른 장미』 수필집 『꿈을 잇는 조각보』, 산문집 『노매실의 초가집』, 『서울시 도보 해설 스토리북』가 있음. 현재 계간 『문파』 주간,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