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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세복 시인 / 밤의 저수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

배세복 시인 / 밤의 저수지

 

 

 달의 저편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당신이 말했죠 밤은 깊어가고 우린 저수지 근처에 있었죠 뒤편 저쯤에다 커다란 거울을 쏘아 올리면 돼! 하늘에는 보름 가까운 달이 떠 있었죠 나도 당신 따라 달을 올려다봤죠 언제나 같은 얼굴만 보여주는 달의 낯, 당신처럼 말이죠 다시 귀 기울이는 내게 당신은 말이 없었죠 한참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당신, 저수지를 보고 있었죠 물낯에 환하게 떠오른 달

 

 당신이 더 잘 알 거예요 밤마다 당신은 내게 저수지를 만들어주니까요 함께 걷던 교각 아래 푸른 물은 넘쳐버렸고 소매를 붙잡던 그 밤의 악다구니들도 녹아 내려요 또 달이 떠올라요 오늘도 앞면만 보여주네요 당신처럼 늘 웃고 있는 달, 거울을 쏘아 올리는 대신 나는 저수지로 뛰어들죠 물낯을 허우적거리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요 거기 달의 뒷면이 있어요 온갖 기억 받아먹는 저수지가 있고 당신은 울고 있고

 

시집 『목화밭 목화밭』(달아실, 2021) 중에서

 

 


 

 

배세복 시인 / 불이라는 고리

 

 

1. 불의 기원

 

 무논의 햇살에 반사된 보릿짚이 범인이었죠 농번기의 적막함은 공범이었고요 누항의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샛노란 빛깔, 적어도 소년의 눈에는 그랬죠 불은 방사형으로 뻗어나갔죠 검은 재만 남겨놓고, 어느 시절의 그 추문처럼 말이에요 소년은 덜컥 겁이 났죠 저 집안의 둘째 아들내미래, 망나니 같은 놈! 보여준 적 없는 내면을 들켜버릴까 걸음을 빨리했죠 툇마루는 소년을 숨기기에 적당했고 아버지의 불내음은 그를 그을음 가득한 마루 밑으로 포복하게 만들었죠 발화의 원인에 대한 뒷집 아줌마의 증언, 그리고 되풀이되는 아버지의 전언, 영선이랑 종문이 그놈들이란다 망할 놈들! 소년이 아닌 그의 또래들이었죠 이번에는 물풀 가득한 둠벙 속인 듯 찰방찰방, 그을음만 수초처럼 달라붙었죠 이건 꿈이야 혹은 가수 상태? 소년은 다시 수마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죠

 

2. 불의 발달

 

 농번기 한가운데 놓인 농부들의 훈육 방식은 그를 쪼그라들게 만들었네 기둥에 묶인 채 맞았다는 또래들의 소문은 또 한 번 툇마루로 숨어들게 했네 어둠만 찾아다니는 쥐며느리거나 혹은 부지깽이에 깨갱거리는 강아지, 그의 신세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네 해는 바뀌고 또래들의 눈빛에 무심해질 즈음 그에게도 거뭇거뭇 콧수염이 찾아왔네 그즈음 일찍 다가온 겨울이 누군가와 공범 되어 한 번 더 마을에 불을 질렀네 볏짚이었네 농한기의 괭이와 쇠스랑 따위가 홍염을 갈랐네 무료한 초겨울은 이미 그들을 한데 뭉쳐놓았고 거기 영선이가 종문이를 향해 키득이고 있었네 종문아 종문아 우리 재작년 그때, 보릿짚에 불 질렀을 때 겁나 재밌지 않았냐!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는 기억나지 않았네 그저 콧수염 사이로 혼잣말만 자라고 있었을 뿐,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았네 한걸음에 달려가 그들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그는 벌써 욕망을 잠재우는 법,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깨우친 나이가 되어버렸네

 

3. 불의 지속

 

 TV 밖 사내의 시선에는 드라마 한 장면 펼쳐져 있고, 화면 속 주인공은 과거의 기억을 전혀 지우지 못하는 배우, 과잉기억증후군, TV 밖 사내는 생전 처음 듣는 병명이고, 이내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아내가 불러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안중에는 어느새 샛노란 보릿짚 들어와 있고, 성냥 긋는 소년 있고, 하늘까지 치닫는 홍염, 아이고 아이고 아줌마 통곡 있고, 여보! 아내의 외치는 소리에 다시 화면 들여다보면 뉴스 앵커 역인 멀쑥한 아까 그 배우 있고, 인터뷰 진행 중, 출연자의 대사에 사고로 죽은 옛 애인의 사소한 말투까지 떠올리면서 눈물 가득 맺혀 있고, 인터뷰 멈추고, 방송사고, 다시 그 배우의 시선 속에서 빠져나온 TV 밖 사내의 눈엔 여러 날 꿈속 펼쳐지고, 소년이 놓은 불을 여기저기 옮기는 또래들, 그걸 목격하는 아줌마, 전언하는 아버지, 수군대는 마을 사람들, 다시 TV를 보면 배우를 애처로워하는 여주인공 있고, 함께 술 마시고, 잠시 후 서로 두 눈 그렁그렁한 채 입 맞추는 그들, 왜 또 그래요! 어깨 흔들려 고개 들면 TV 밖 아내가 어느새 다가와 있고, 그 품에 이제 막 첫돌 지난 아이의 꼬물거리는 발가락, 거기 입 맞추려 다가서는 사내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잉의 기억은 흘러만 가고, 흘러서 다시 되돌아온다고들 하더라도, 그리고

 

시집 『목화밭 목화밭』(달아실, 2021) 중에서

 

 


 

배세복 시인

충남 홍성에서 출생. 201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으로 『몬드리안의 담요』, 『목화밭 목화밭』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문학동인〈Volume〉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