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령 시인 / 실종
신천댁이 사라졌다
사흘 전까지 웃으며 고기도 드시고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고 하지만
십수 년 전 영감이 사라지고 나서 아니 그 이전 고물고물한 아이들의 젊은 엄마일 때 설거지물을 텃밭에 뿌리러 나올 때면 가끔씩 검은 머리와 눈썹이 흐릿해지는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그 친구들 대청마루에 북적일 때면 단박에 선명한 색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간격이 너무 멀어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새날을 헐어낼수록 새 밤을 흘려보낼수록 온몸의 빛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빈 집에서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마당 들어서며 부르면 느릿느릿 걸어 나오곤 했다
형체가 사라지고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날이 늘어갔다 명절이나 휴가철 자식들 들르는 날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옷감의 물이 빠지듯 온몸의 색이 바랬다 벽 속으로 사라지는 날이 잦아지고 옅은 회색빛을 띠다가 허공에서 불쑥 한 팔이 솟아나곤 했다
일 년 전 작은 딸이 부산으로 모셔갔을 때 실루엣만이 따라갔다가 한참 후 겨우겨우 뒤따라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다시 고향집 돌아와 한달 후
신천댁 벽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김령 시인 / 간절기
시험 앞둔 아이 위해 고기를 굽는다
붉은 살점을 후라이팬에 나란히 눕히고 살뜰히도 뒤집으며 통후추를 뿌린다
남의 숨에 기대어 연명한 목숨
고기 한 점마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오르길 바라듯
표고버섯과 피망도 색깔별로 울긋불긋 버터 두르고 굽는다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손끝에서 뒤집히던 저 깊고 층층한 욕망의 사다리
사다리 위쪽에 다다랐으나 자랑이던 털가죽으로 위기에 몰린 눈표범처럼
출구도 없이 맹렬하게 달려드는 허기
김령 시인 / 붉은 얼룩
모래를 적시는 물처럼 꽃그늘은 집요하게 번져온다
위로받기 위해 찾아갔으나 더 큰 슬픔을 내밀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일어선 것처럼
백 일을 겹친 그늘 아래 앉았다 일어서면 자꾸만 뒤가 돌아보아진다
얼마나 한이 깊으면 백 일을 붉나
옅었다 짙어진 그늘에 날개를 다친 새와 물을 떠난 지 오랜 조개껍질과 날다가 지친 바람이 머문다
둥글게 오려진 그늘섬
어떤 날은 홀로 독차지하고 어떤 날은 늙은 개와 나눈다
눈곱 가득한 눈으로 그늘 한쪽을 점령한 개는 전생에 내 어머니였을지도 몰라
그늘을 털고 나오자 온몸에 번지는 붉은 얼룩
김령 시인 / 심심함에 대하여
내가 태어나기 전 잠시 머물렀던 진공처럼 텅 빈 공간
옅은 안개 냄새, 회색 섞인 흰 음식으로 치면 간이 슴슴한
심심하다는 말
염색한 옷감 천천히 물이 빠지듯 아집도 독선도 빛이 바래지
사람들 사이 심심함을 부어두면 강물처럼 찰랑이는 여백
사공도 배도 없는 빈 나루터
늙은 시인의 한나절
심심한 시간
내가 저세상에서 이르기 전 거치는 이토록 황홀한
-김령 시집 <어떤 돌은 밤에 웃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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