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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령 시인 / 실종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

김령 시인 / 실종

 

신천댁이 사라졌다

 

사흘 전까지 웃으며 고기도 드시고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고 하지만

 

십수 년 전 영감이 사라지고 나서

아니 그 이전 고물고물한 아이들의 젊은 엄마일 때 설거지물을 텃밭에 뿌리러 나올 때면

가끔씩 검은 머리와 눈썹이 흐릿해지는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그 친구들

대청마루에 북적일 때면 단박에

선명한 색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간격이 너무 멀어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새날을 헐어낼수록 새 밤을 흘려보낼수록

온몸의 빛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빈 집에서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마당 들어서며 부르면 느릿느릿 걸어 나오곤 했다

 

형체가 사라지고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날이 늘어갔다

명절이나 휴가철 자식들 들르는 날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옷감의 물이 빠지듯 온몸의 색이 바랬다

벽 속으로 사라지는 날이 잦아지고

옅은 회색빛을 띠다가 허공에서 불쑥

한 팔이 솟아나곤 했다

 

일 년 전 작은 딸이 부산으로 모셔갔을 때

실루엣만이 따라갔다가 한참 후

겨우겨우 뒤따라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다시 고향집 돌아와 한달 후

 

신천댁 벽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김령 시인 / 간절기

 

 

시험 앞둔 아이 위해

고기를 굽는다

 

붉은 살점을 후라이팬에 나란히 눕히고

살뜰히도 뒤집으며 통후추를 뿌린다

 

남의 숨에 기대어 연명한 목숨

 

고기 한 점마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오르길 바라듯

 

표고버섯과 피망도 색깔별로

울긋불긋 버터 두르고 굽는다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손끝에서 뒤집히던

저 깊고 층층한 욕망의 사다리

 

사다리 위쪽에 다다랐으나

자랑이던 털가죽으로 위기에 몰린 눈표범처럼

 

출구도 없이

맹렬하게 달려드는 허기

 

 


 

 

김령 시인 / 붉은 얼룩

 

 

모래를 적시는 물처럼

꽃그늘은 집요하게 번져온다

 

위로받기 위해 찾아갔으나

더 큰 슬픔을 내밀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일어선 것처럼

 

백 일을 겹친 그늘 아래 앉았다 일어서면

자꾸만 뒤가 돌아보아진다

 

얼마나 한이 깊으면 백 일을 붉나

 

옅었다 짙어진 그늘에

날개를 다친 새와

물을 떠난 지 오랜 조개껍질과

날다가 지친 바람이 머문다

 

둥글게 오려진 그늘섬

 

어떤 날은 홀로 독차지하고

어떤 날은 늙은 개와 나눈다

 

눈곱 가득한 눈으로 그늘 한쪽을 점령한 개는

전생에 내 어머니였을지도 몰라

 

그늘을 털고 나오자

온몸에 번지는 붉은 얼룩

 

 


 

 

김령 시인 / 심심함에 대하여

 

 

내가 태어나기 전 잠시 머물렀던

진공처럼 텅 빈 공간

 

옅은 안개 냄새, 회색 섞인 흰

음식으로 치면 간이 슴슴한

 

심심하다는 말

 

염색한 옷감 천천히 물이 빠지듯

아집도 독선도 빛이 바래지

 

사람들 사이 심심함을 부어두면

강물처럼 찰랑이는 여백

 

사공도 배도 없는 빈 나루터

 

늙은 시인의 한나절

 

심심한 시간

 

내가 저세상에서 이르기 전 거치는

이토록 황홀한

 

-김령 시집 <어떤 돌은 밤에 웃는다>에서

 

 


 

김령 시인

전남 고흥에서 출생. 2014년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 시부문 당선. 2017년 『시와 경계』 신인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