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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연 시인 / 친절하게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

서정연 시인 / 친절하게도

 

 

사랑한다고 말해서

너를 따라갔다

 

너는 때로는 삶처럼 신중하고 민첩하고 비를 맞은 듯 또한 축축하기도 했다. 친절하게도 처음으로 거웃이 선명한 성인용 잡지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어느 날은 친절하게도 상영관 벽에 나이 이른 여자를 세차게 밀치며 영화 속 흥분한 사내처럼 코피를 흘렸다. 친절하게도 너의 불룩한 아랫도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해준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버림받아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무서웠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죽은 형 이야기를 할 때는 슬퍼 보여서 너를 따라 무덤에 갔다. 너는 친절하게도 무덤가에서 손목시계를 보며 여자의 치모를 헤집고 정점에 도달하는 시간을 쟀다. 묏등의 띠는 삐비처럼 보드라운 여자의 등을 할퀴었다. 달리 할 일이 없는 여자는 몸을 빠져나왔다. 여자는 여자를 지켜보았다. 맑은 햇살이 눈을 찔러서 여자는 여자에게 이것은 내가 아니야, 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내가 아니니 나는 안전하다.

너는 때로는 비에 젖은 살쾡이처럼 은밀하고 날렵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도 했다. 여행을 떠났다. 너를 따라 섬에 갔다. 친절하게도 너는 각본을 가지고 있었다. 첫 술을 마셨고 나는 너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뱀의 허물을 벗은 너의 알몸은 친절하게도 흉기였다. 목을 짓누르는 늪 같은 공포가 엄습했으므로 나는 나에게 이것은 내가 아니야, 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친절하게도 섬에 갇혔다.

 

 


 

 

서정연 시인 / 목련의 방식

 

 

비 맞는 목련꽃을 본다

흰 꽃은 아주 그리웠을까

 

속살을 버리듯이

사랑을 버리듯이

비를 맞는다

 

자꾸 뒤돌아 보게한다

 

온몸으로 자신을 버리는

목련꽃

 

 


 

서정연 시인

전남 나주에서 출생. 2012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목련의 방식』(문학의전당, 201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