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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찬세 시인 / 가로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

박찬세 시인 / 가로수

 

 

한날한시에 심은 나무들도

제각각 다른 무늬의 그림자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한날한시에 부는 바람에도 나무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떨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에 매달려 떨고 있는 빗물에도

방울방울 다른 것이 어려 있겠습니다

 

 


 

 

박찬세 시인 / 체위의 진화

 

 

오른손만 한 것도 없지,

올무에 걸렸다 풀려난 개는 벗겨진 뱃가죽을 핥고

오른손은 개를 부른다

오른손 밑으로 개의 머리가 지나간다

눈에 흰자가 보이도록, 여러 차례

개는 상처를 핥다가 거기까지 핥고 있다

거기까지 상처였다는 듯

진부해, 누군가는 왼손을 말했지만

어색한 것이 새로운 것일까

오른손은 체위에 대해 골몰한다

너는 잠들어 있고 나는 너를 떠올리며

오른손만한 것도 없어, 읊조리는 새벽

발버둥칠수록 조여드는 올무

개는 핥는다, 배어 나오는 고름을

 

 


 

 

박찬세 시인 / 냉장고 속 크레바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전화기를 만진다

누군가 울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송신되지 못하는 말들이 손끝에서 우둘두둘 돋아난다

 

아버지가 크레바스 속으로 사라지던 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어머니는 밤새 이불을 덮어 쓰고 울었다

크레바스는 왜 비명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들썩이는 이불더미 속에서 냉장고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며 크레바스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발명가들은 물건을 만들 때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습성을 답습한다는 데

당신을 오래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젖은 눈 속에 뒷모습을 담아두는 건

말을 배우기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풍습이다

냉장고를 들어 낼 때면 웅크린 모습으로 남아 있는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담뱃불도 촛불처럼 타오를 때가 있다

남극에서 날아 온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장이다

문장 안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의 깊이를 나는 아직 모른다

세상에 문장 하나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인간이지만

문장을 하나를 건너는 데 꼬박 한 생이 걸리는 것도 인간인 것이 다

인간은 멸종 될 때까지 시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세상에 남겨진 문장들을 떠올린 다

생의 크레바스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

한 문장을 건너가고 있는 인간이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

별들이 젖은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건

아무도 크레바스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남극은 있는 것이다

크레바스에 몸을 두고 빠져 나온 비명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남극에서 불어와서 남극으로 불어간다

치밀어 오르는 열과 기침처럼 생각나는 얼굴들은 바람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극을 위하여 낙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막을 걷고 아마존엔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남극에선 감기에 대한 농담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남극에 밤이 시작되면

암사자들은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어머니들은 이웃의 냉장고를 함부로 열어보지 말거라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지 말거라 가르친다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은 문장을 찾아가기 위해 밤마다 냉장고 우는 소리를 엿들으며 자란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냉장고를 열고 밥상을 차린다

눈보라치는 숟가락 속으로 뾰루퉁한 내가 거꾸로 담긴다

별들의 눈이 젖는다

 

 


 

 

박찬세 시인 / 체취의 시점

 

 

당신이 자궁에 두고 온 두 눈이라 이르면 나는 자궁에 두고 온 혀라 하겠습니다 캄캄하고 고요한 이력들이 뒤척이는 시트 위, 체취를 어루만지는 일을 자정이라 이르면 체취 사이에서 헝클어지던 고요를 정오라 하겠습니다 하여 당신이 차를 이르면 나는 초를 켜두겠습니다 이해는 체취를 잊고 문장을 잃는다 이르면 오해는 문장을 구해 체취를 기록한다 하겠습니다 당신이 바람을 아버지라 이르면 내가 꽃을 어머니라 부르겠습니다 아니, 파도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머문 시트 위에 써두겠습니다-닿을 수 없는 곳에서 파도는 떠밀려 오고 파도를 거스르며 지느러미는 자란다-하여 내내 거기서 흔들리겠습니다

 

 


 

 

박찬세 시인 / 골목의 표정

 

 

딱딱해요 툭, 툭 부러지는 골목은

열두 시의 그림자에서 다섯 시의 그림자로 기울어져 가요

아직까지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툭, 골목이 뱉어 낸 비둘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고

툭, 골목이 뱉어 낸 개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골목이 부러진 곳에서 사라져요

아직도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휴지조각들은 왜 잔뜩 찡그리고 벽 쪽으로 굴러가나요

발목이 부러진 소녀가 보는 하늘은 어제의 하늘

골목은 가끔씩 조용합니다

불행해지고 싶어요

골목이 숨긴 소리들은 간지러워서

어느 순간 빵! 하고 터집니다

창문들의 닫힌 입속으로 똑같은 풍경이 들어가고

커텐은 말이 없습니다

미칠 것 같아요

엄마는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뽑아 버리고 싶은 건 나였겠죠

골목은 왜 같은 표정인가요,

골목이 소녀를 보여 줍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잠깐 숨기는 동안.

소녀가 단 한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골목은 소녀 같은 표정이었을까요

 

 


 

박찬세 시인

197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제16회 《실천문학》 신인상에 Cold Bird외 3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  <눈만 봐도 다 알아>(창비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