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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상권 시인 / 낙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

한상권 시인 / 낙관

 

 

주산지에서 풍경화를 그리다가

왕버들나무처럼 온몸이 젖어 있다가

야송미술관 옆 넓은 밥집 마당으로 옮겼다

송소고택의 헛담에 대해 이야기하며

잠시 단풍과 단풍 사이를 붉게 거닐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진 창가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인데

갑자기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을 식당 통유리에 부딪혀 기역자로 꺾였다

누군가 단지 유리창 밖의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느 우주에선가 온몸을 던져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옹호했지만

텅 빈 구두로 가득 찬 밥집을 걸어 나오면서

발 앞에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주우면서

온몸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닿지 않는 길 위에서

문득 가을이라는 유리 속에서

새와 세계와 나의 관계를 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한상권 시인 / 삼청동 식빵집 실습생

 

 

빵의 기본은 식빵

밀가루에 대한 계량과

반죽을 치는 속도와 시간에 따라

식빵의 결이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우연의 손길로 반죽한 밀가루를

네모난 발효기에 넣고 40분 정도 발효시킨다면

빵도 쿠키도 아닌 슬픔의 물질이 나오는 것

채 먹지도 않고 갈라지는 식빵의 틈,

여길 봐 반죽의 온도는 27도

수천 번의 연습으로 우연의 횟수를 줄여야 해,

갓 구운 식빵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선

잠들지 않는 풀빛과 소낙비와

은행잎과 흰 눈송이의 배합이

모두 이 반죽 안으로 녹아들어야 해.

바람처럼 가볍고 촉촉하고 달콤한

식빵으로 대동단결하려면

어디에도 없는 천연의 부드러움을 찾아야 해.

나는 소망하지, 빵을 굽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잘 몰라도

내가 구운 빵을 매일 너에게 주고 싶다는 것

정말이야, 나의 실습 일지엔

부풀어 오른 프거운 생각으로 가득하지

 

한상권 시집 <그 아이에게 물었다>에서

 

 


 

한상권 시인

1962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 강원도 속초에서 성장.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단디』(시인동네, 2015)가 있음. 현재 대구 삼인고 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