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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호빈 시인 / 다음은 뭘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7.

최호빈 시인 / 다음은 뭘까

 

 

소중한 순간은 한꺼번에 몰려들지

같은 질문을

각기 다른 언어로 물어보는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여름처럼

소중한 순간은 쉽게 흘러가지

 

멀어져서 지루한 것인지

지루해서 멀어지는 것인지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그것은, 늘, 거기에, 있어

 

아니, 태풍을 휩쓸고 가는 태풍처럼

그 여름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

누군가 여름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선생님이 불러주는 문장을

제대로 받아써도

공책을 내놓을 때마다 들었던

제대로 받아쓰지 않은 느낌

 

우리는 닮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니,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닮지는 않았습니다

 

사방이 캄캄해질 때까지

춤이나 추자

그러니

지나간 자리를

움직이는 세상을

마른걸레로 말끔히 닦듯이

춤이나 추자

 

문을 만들자

안에 들어가서 잠글 수 있는

상자의

문을 만들자

 

수북하게 쌓인 밤이

먼지처럼

날아가는 밤

 

벨이 울렸다

 

상자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우리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다음은 뭘까

 

 


 

 

최호빈 시인 / 펄

 

 

반짝이는 파도를 오래 보고 있으면

밀려올 것이

밀려올 것만 같다

당신이 내게 그랬듯이

 

갯벌에 아이들이 무리 지어 있다

펄에 빠지는 발 때문에

그냥 누워 있거나

무릎으로 기어 다니고 있다

 

펄에 뒤덮인 아이들이 당신을 향해 반짝인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리니

아이들이 작아진다

구름이 또 해를 가리니

작아진 아이들이 더 작아진다

 

작아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밀려올 것이

벌써 밀려온 것만 같다

 

바다로 변해 있었던 갯벌이 다시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 갯벌에 앉아

반짝이는 파도를 보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밀려오고 있다

 

당신이 내게 그랬듯이

기다리게 된다

 

 


 

최호빈 시인

1979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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