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시인 / 불꽃
수천 마리의 나비 떼
줄지어 날아오르다가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봄을 알고 싶어 스스로 꽃도 되고
사랑을 느끼고 싶어 혼자 붉은 입술도 되어보다가
그러다가 끝내 꽃 지고 사랑은 떠났을터,
그러나 슬픔이여!
그게 어디냐고 되뇌지 말고
다만, 불씨로 건드려만 봐라
지금은 어떤지 몸짓으로 보여 주겠다
이정모 시인 / 시코쿠를 떠나며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고 나온 것처럼 어디서 본 듯한 집들이 흘러가고 물 위를, 바다 위를, 한낮의 햇살 속을 기차는 간다 이름도 모르는 역이 풍경도 생경한 마을로 안내하고 연기처럼 몽실한 사연들이 옹기종기 모여 손을 흔든다 내가 바라는 건 아니지만 간격은 멀어지고 차장은 차표를 보자 하고 인사는 차표와 함께 내게 남아 있다. 표가 있다 한들 떠나는 길 뜨거운 여로에 가슴 메는 순간 선로는 발을 구르지만 눈꺼풀 속으로 자꾸 무너진다 헤어지기 좋은 시간도 아니고 하찮은 영혼은 하나도 없으나 몸은 무심하게 놓친다 내가 다 쓰고 만 시간들이 멀어져 방목에 감염되고 있는 중이다 두고 온 닭 소리와 함께 마음도 풀어놓고 왔는데 기차는 울다 그쳤는지 간혹 떨면서 간다 나는 그녀의 애인이 되고 싶은데 고도는 속한 적이 없다고 나를 버리고 간다
이정모 시인 / 햇살 공양
가을 산이 자꾸 묽어지고 있다 올라야 할 허공은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바람을 타고 일어서려다 금세 무너지는 낙엽
이젠 아무도 이름 부르지 않는 영혼이 허공의 손끝을 벗어나 출렁, 다음 생에 내려앉는다
보이지 않는 공중의 손이 제 생명으로 다리를 놓는 것인지 묻지 않으니 바람도 묻지를 않는데
누가 퍼붓는지 모르면서 왜 나는 노란 평화를 햇살 공양 받으며 가난한 산의 말을 줍고 있는가
더 이상 발기하지 않는 가을 숲은 갈참나무 마지막 도토리를 뱉어내고
수많은 전생을 거쳐왔을 11월의 몸은 바람마다 피를 흘리겠지만
나는 아무도 걷어 가지 않는 파장의 이 계절을 붉어지는 데 한 생을 다 써버린 장미의 디스토피아에 두고 올 것이다
얼마간 나는 간절하지 못한 죄목으로 이 서러움의 서식지에 바쳐질 것이므로
이정모 시인 / 은유의 메뉴얼
시간을 닫은 적막한 빈집 그 눈부신 고요 속에서나 수상한 숨 몰아쉬는 가을의 뒤태가 그렁이는 걸 보면 아시라 보이고 싶은 것은 갇혀있다
나무의 침묵을 모르는 생의 가벼움 불쏘시게로 잘게 쪼개어 아궁이에 던져 넣으니 지구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
바람과 햇살에 빌려와 애벌레에게 갚았다 계곡을 물들이며 흘러가는 저 붉은 잎의 선명한 행적 조용히 흔들리는 물에서 길을 본다
이번 생의 하찮은 날과 견디고 벗을 때를 알고있다 다녀갔다는 흔적 감추지 않고 신비한 언어를 읽으며 간다
이정모 시인 / 종이를 자르며
종이의 습성을 가진 슬픔 지난 아픔은 곱게 넣어 봉하지만 때로는 젖은 봉투처럼 찢어지고 싶을 때 있는 것이다
곁눈질은 아예 생각지 않고 베인 마음 가득 채우니 가위 소리가 그때부터 흘러넘쳐 눈물을 먼저 보내는 것이다
오래전에 놓아버린 구름이 침묵에 기록한 긴 문장 하늘이 된 계단에 문을 달고 그리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뜨거운 울음을 담금질하다 식은 오늘에야 마음내어 새로 내민 가지에 기억을 올린다 야윈 어제의 놀라움을 닦으려 황망히 종이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정모 시인 / 곡선에 대하여
직선을 버리고 하늘을 날아 오른다 휘청거리는 목표와 방황을 따라 궤도는 움직이는 미학 너의 아름다움을 뒤 따라간다
선은 생명의 결 흐르는 느낌은 살아있다 유연하게 깃발이 펄럭일 때 바람은 지나간 날을 보지 못한다
갇혀있는 허공은 몸부림치고 시간은 번득이질 않는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휘어진다 절망을 찾아 떠나는 날개 가벼워지는 걸 두려워 않는다
뒤에 남은 절집이 새가 날아간 무늬에 대하여 입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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