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 시인 / 배롱나무 성찬
배롱나무는 다시 상(床)차림을 한다
뻗쳐 올린 가지 끝마다 한 접시 한 종지 한 사발 한 대접 꽃밥과 꽃찬과 꽃국 들을 담았다
몸살 차살 하던 태풍 지난 게 엊그제, 곧장 또 두레상으로 한 상 차려 받든 것이다
- 거기, 누구 없소? 하늘 쪽을 향해 나는 외친다
- 진지 드시오!
조기현 시인 / 쓰레기 명상
고적하구나, 어둠은 벌써……
아파트에 살며 쓰레기를 들고 나온 저녁 배출소엔 먼저 내놓인 쓰레기봉지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온몸을 꽁꽁 싸맨 채, 등과 등을 맞대고 곧 이송될 포로들처럼 웅크린, 저 영혼 없는 존재들
어디서 소멸을 이루게 될까
그렇지 어릴 적 혼자일 때면, 쓰레기하치장을 뒤지며 놀곤 했었어. 그곳은 껍질과 찌꺼기, 깨지고 찢기고 무르고 썩은 것들만의 아수라였으나……, 꿈도 욕망도 미처 싹트지 못했던 시절, 세상이란 게, 인생이란 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무연히 깨치게 해주던 곳, 그리곤 오래도록, 묵연히, 교실마다 칠판과 책걸상이 있던 학교를 다녔을 뿐 그런 기억뿐이건만, 그새 어찌하여 낯선 공장들의 가동음(可動音)이 내 음성 속에서도 나기 시작하였던 것인지, 그로부터 그 공장들엘 드나들며 나도 뭔가를 파먹고 살아온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 공장들도 그만큼 나를 갈아 먹고 녹여 마셨던 것, 어쩌다 우리는 숱한 나날들을 그렇고 그렇게 보내버렸는가. 다만 여기, 내 손에 수북 들린 건, 그 세월이 남긴, 우리가 서로 그토록 엄정히 주고받았던 영수증 따위들
잘 가라, 한물 가버린 영혼들
지난 날 매립장으로 갔던 너희도 오늘엔 소각장으로 간다지,
공교로워라, 사람의 시신(屍身)들도 그와 마찬가지로구나
또한 여기 우리가 이미 마찬가지로다
편히, 잘 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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