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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대선 시인 / 비상식량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3.

서대선 시인 / 비상식량

 

 

백련꽃 세 송이 사들고

꽃집을 나섰네

앞에서 걸어오시던

할머니 한 분

두 손 모아 합장하곤

공손히 절을 하시네

부처를 보신

할머니 두 손에서 돋아난

백련꽃 이파리 마다

천수관음의 손이

신호등 앞에 서있는

백팔번뇌 주머니에

연밥 한 알씩

넣어주시네

 

 


 

 

서대선 시인 / 레이스 짜는 여자

 

 

한때 나

종달이 되어 수직으로 날아올라

봄 하늘의 분홍 마음 한입 물고

보리 싹 같은 그대 품속으로 뛰어들면

간질간질 봄 햇살에 달구어진 두 볼에선

복숭아꽃 향기 가득하였는데

 

한때 나

분홍신 신고서 멈출 수 없는 춤으로

푸른 숲 우거진 그대 정원으로 달려가

연초록 이파리마다 은종을 달아주고

꾀꼬리의 노래 속에 그대와 왈츠를 추며

붉은 찔레꽃 덤불 속으로 들면, 꿀벌들은

사랑의 화살을 꽃 속으로 날리고

스텝이 꼬인 우리는 깔깔거리며

아득아득 멀미를 하곤 했었는데

 

한때 나

졸졸졸 시냇물 되어 우리 이야기

하류에 차곡차곡 삼각주도 만들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안아주고

태풍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를 만나면

잔뿌리까지 스미어 열에 들뜬

이마에 찬 수건 얹어주었는데

 

그대가 서 있던 벼랑에서 저녁놀을 바라보며

붉어진 바다 위로 자맥질 하던 별들이

산호초 속으로 잠수하면

북극에서 부르면 남극에서 화답하는 고래가 되어

그대가 함께 수평선을 넘고 싶었건만

거대한 해일에 떠밀린 나는

이름 모를 해변에서

난파한 채 떠다니는 우리 이야기를

조각 조각 줍고 있는데······

 

 


 

 

서대선 시인 / 네 몸에 젖어들고 싶은 이슬비

 

 

아마,

네가 잠 못 이루며

밤하늘을 쳐다보았을

어느 밤,

는개가 된 내가

네 곁을 스쳐 가고 있었던 걸

너는 알까?

바람 부는 산꼭대기에서

천년을 기다리는

나무가 된 네가

허리가 휜 채

반쯤은 저승에 발목 잡혀

눈물 그렁이며

밤바람 속에서

서 있던 봄밤

나 이슬비 되어

네게 젖어들고 싶었던 걸

너 알까 몰라라,

알까 몰라라.

 

 


 

 

서대선 시인 / 벼랑

 

 

오로지,

시 한편 불러내기 위해

두어 시간 차를 몰았네

바다가 보이는 마을

돌무더기 길

30여분 더 걸어

천길 절벽 앞

너럭바위에 섰네

 

거기,

바다와 하늘이

껴안아 만들어내는

노을이 있었네

 

세상,

곡진한 시 한 편 만나러

땅 끝까지 갔더니

바다와 하늘이

나 서 있는 벼랑 쪽으로

노을을 밀어 올리고

끌어 올려주고 있었네

 

 


 

 

서대선 시인 / 3월

 

 

젖내 아른아른

흘러가는 시내한테

햇살이 까꿍까꿍 간지럼을 먹이면

방그레 웃으며 기어와서

오물오물 젖을 빠는,

배냇짓 하는,

옹알거리는,

아가야, 우리 아가

 

 


 

 

서대선 시인 / 봄밤 홀로 깨어

 

 

비오는 봄밤

홀로 깨어

백목련 눈뜨는 소리 듣는다

세상 풍설을 견뎌낸

뿌리들을

오래 오래 안아주고 싶다

 

 


 

 

서대선 시인 / 내력

 

 

밥상머리에서

아버지 말씀 하셨네

배부른 사람 되지 말고

머리 부른 사람 되라고

입으로만 먹는 지렁이

되지 말고 지혜를 먹는

큰 바위 얼굴 되라고

 

아버지 손잡고 들판에 나가

마른 논에 물들어 가는 소리 들었네

푸르게 흔들리는 벼

인간의 허기를 채우는 소리에

귀 기울였네

 

이마가 푸른 젊은 엄마가 수줍게

돌아 앉아 아기 젖을 물리네

엄마 몸에서 아기 몸으로

흘러드는 불멸을 보았네

 

 


 

 

서대선 시인 /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리라*를 켜던 네 손가락은

길고 부드러웠다

진흙 뻘에 엎드려 있던 나를 깨운

너의 손길은 너무도 섬세하고

조용하여서

젓가락 잠자리의 날개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서늘한 바람에 내 몸을

말리면서

젓가락 잠자리 날개가

스치듯 네 손이

리라의 현을 켜면

보랏빛 수국들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느릅나무 그늘 아래서

네 팔 베개를 베고 누워

꿈꾸는 동안

흔들리는 잎 사이로

햇살이

빗살무늬를 새겨주었다

 

내 안에 가득한 너의 손길

리라의 현이 떨리고 있다

   

*리라-고대 악기로 하프의 일종

 

 


 

서대선 시인

1949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2009년 시집 <천년 후에 읽고싶은 편지>로 작품활동 시작. 2013년 《시와 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레이스 짜는 여자』가 있음. 2014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상(문학부문). 현재 신구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저널 21 문학 담당 편집위원.